[O2/두 청춘의 무작정 유럽축구 기행]<4> 맨유-선덜랜드전서 뜻밖에 본 ‘Ji의 대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12일 03시 00분


지성 폭풍 드리블에 와! 동원 키높이 축구에 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올드트래퍼드로 몰려오고 있다. 축구는 그들에게 일상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이 올드트래퍼드로 몰려오고 있다. 축구는 그들에게 일상이다.
‘소원을 말해봐.’ 걸그룹 ‘소녀시대’의 노래처럼 소원을 빌었다. ‘5일 올드트래퍼드 피치(운동장)에서 박지성과 지동원을 모두 볼 수 있게 해주소서.’ 소원은 기적같이 이뤄졌다. 전반 4분 만에 선덜랜드의 공격수 코너 위컴이 부상으로 나가고 대신 지동원이 들어왔다. ‘두 선수 모두 득점할 수 있게 해 주소서.’ 이런, 소원이 좀 더 커졌다.

“박지성이다!”

맨체스터에는 경기 이틀 전에 도착했다. 연습장에서 박지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캐링턴 연습구장은 맨체스터 시내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말들이 풀을 뜯는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한적하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려고 차에서 내리자 묻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가리켜 준다.

차량을 통제하는 길에 이르자 ‘선수들이 사인한 축구용품의 판매를 막기 위해 선수들이 더는 축구용품에 사인을 해주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을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맨체스터 구단에서 설치한 이 안내문 덕분에 연습구장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연습구장을 찾는다고 해서 선수들의 훈련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입구에서 자가용으로 출입하는 선수들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차를 세워줘야 가능하다. 팬들이 선수들의 차를 막아서는 일은 엄격히 통제된다.

오전 11시가 조금 지나 연습구장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이미 10여 명의 팬이 모여 있었다. 아일랜드, 독일, 중국 등 국적도 다양했다. 중국 여대생은 연습구장을 네 번이나 찾아온 ‘전문가’였다. 이 전문가에 따르면 선수들도 직장인처럼 오전 9시∼9시 반인 출근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퇴근 시간은 개별 훈련에 따라 달라지지만 보통 오전 11시 반부터 선수들이 나온단다. 그녀는 예전에 오후 2시 반이 넘어서야 박지성을 만날 수 있었다고 했다. 역시 박지성이다.

연습장에 들어오는 박지성과 한 컷.
연습장에 들어오는 박지성과 한 컷.
입구에서 맨유의 스타들을 만나는 재미는 쏠쏠했다. 사생활 문제로 말이 많았던 라이언 긱스는 의외로 제일 친절했다. 주전 골키퍼 다비드 데 헤아는 악수를 청하자 골문을 책임지는 듬직한 손으로 덥석 우리 손을 잡아 줬다. 파비우, 하파엘 쌍둥이는 실제로 보니 누가 누구인지 더 헛갈렸다. 박지성의 포지션 경쟁자 나니는 멋진 차를 가졌다. 공격수 웨인 루니와 중앙수비수 네마냐 비디치는 멀리서부터 차 속력을 올려 팬들 사이를 아찔하게 빠져나갔다. 그나마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손목시계를 가리키면서 바쁘다는 신호라도 보내줬다.

누군가 “박지성이다!”라고 외쳤다. 검은색 차량이 입구에 정차해 창문을 내리자 거짓말처럼 박 선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샤워를 마친 듯한 깔끔한 얼굴에 초록색 벨벳 트랙톱(트레이닝복 스타일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멋졌다. 세계적인 선수의 풍모가 느껴졌다. 무뚝뚝한 태도도 박지성다웠다. 한마디 해달라는 팬들의 요청에 “예, 안녕하세요”라고 두 마디로 답했다. 사진을 찍을 때면 화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웃어줬다. 1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가슴 뛰는 순간이었다. 그가 떠난 후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초록색 벨벳 트랙톱이 화제가 되었다. 현빈을 연상케 한다는 의견과 다소 무리라는 의견이 맞섰다.

박 vs 지 ‘코리안 더비’를 보다


경기장 주변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 신사의 나라치고는 좀 볼썽사납다. 조영래 우승호 씨 제공 장비 협조=라푸마
경기장 주변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 신사의 나라치고는 좀 볼썽사납다. 조영래 우승호 씨 제공 장비 협조=라푸마
경기 당일, 영국의 명물 이층버스를 타고 올드트래퍼드로 향했다.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아서 경기장 주변은 온통 주차장이 돼 버렸다. 올드트래퍼드로 가는 길가에 영국인들이 즐기는 ‘피시 앤드 칩스’ 가게가 즐비했다.

공식상점(메가스토어) 앞에서 머플러를 파는 ‘비공식 상인들’도 볼거리였다. 맨유 구단은 경기장 앞에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이들이 ‘허가받지 않은 상인’임을 알려주는 안내문을 설치해 놓았다. 물론 현 구단주(글레이저 일가)에 반대하는 의미를 담은 초록과 금색(노랑)의 머플러(그린&골드·맨유의 전신인 뉴턴 히스를 상징하는 색)는 이들에게서만 살 수 있다. 가격은 8파운드 정도인데 흥정하기에 따라 2, 3파운드 깎을 수 있다.

이날 경기와 관련해 한국에선 맨유 박지성과 선덜랜드 지동원의 대결에 관심이 쏠렸지만, 영국에서는 퍼거슨 감독의 취임 25주년이 화제가 됐다. 경기장 외벽에는 퍼거슨 감독의 사진이 실린 대형 현수막이 걸렸고 맨유 구단은 기념 소책자와 스티커를 무료로 배포했다. 양 팀 출전 선수들이 늘어선 가운데 퍼거슨 감독이 입장했다. 관중은 기립 박수로 ‘경(Sir)’이라 불리는 노감독을 맞이했다.

박지성은 경기 전 퍼거슨 감독이 공언한 대로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다. 지동원은 부상당한 위컴과 교체돼 전반 4분 만에 그라운드를 밟았다. 엉겁결에 염원하던 ‘코리안 더비’가 이루어져 한층 흥분됐지만, 경기는 싱거웠다. 주중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치른 여파인지 맨유의 공격은 날이 무뎠고 선덜랜드는 역습 위주의 소극적 경기를 펼쳤다.

박지성은 소위 ‘폭풍 드리블’로 경기를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이날 경기에서도 후반 11분 수비수를 제치고 단독으로 골대 앞까지 파고들어 간 것이다. 비록 마지막에 시도한 헛다리 드리블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지만, 경기 내내 가볍게 박수만 치던 북쪽 스탠드 관중까지 모두 일어나게 한 그야말로 ‘폭풍 드리블’이었다.

지동원은 세계 최고의 수비수들이라 할 수 있는 비디치, 리오 퍼디낸드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전반이 끝날 무렵 그가 날린 왼발 슈팅이 골로 연결되었다면 퍼거슨 감독은 영원히 그 골을 기억하게 됐을 것이다. 경기는 선덜랜드 수비수 웨스 브라운의 자책골로 맨유가 1-0 승리를 거뒀다.

숙소에 돌아와 머리를 감고 나오니 맨체스터 시티의 역전승 소식이 들려왔다. 맨체스터 시티는 맨유를 승점 5점 차로 제치고 프리미어리그 1위를 달리고 있다. 맨유가 더 분발해야 할 시점이다. 25년 된 ‘헤어드라이어’의 활약이 필요하다.

P.S. 퍼거슨 감독은 선수 면전에서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불같이 호통을 쳐 헤어드라이어로 불린다.

맨체스터=조영래 우승호 cy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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