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프랑스 파리의 페클레 거리. 그림자도 몸을 바짝 움츠리는 정오였다.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동네 빵집 앞에 줄을 서 있었다. 그 아이를 꼭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멀찌감치 물러서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자기 키만큼 기다란 빵을 사서 나온 아이가 약속한 듯 경쾌하게 달려나왔다. 못 견디게 귀여운 표정을 얼굴 가득 담고. 홀린 듯 셔터를 눌렀다. 윌리 로니스의 사진 ‘어린 파리지앵’은 그렇게 태어났다. 로니스는 훗날 사진 속 주인공의 장모에게서 전화를 받고 그 거리를 다시 찾는다.
누군가는, 다른 많은 예술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사진에 주석을 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다르다. 저자 윌리 로니스는 프랑스 휴머니스트 사진작가군에 속하며 명성을 날렸던 사진가. 그가 자신의 작품 54점에 직접 주석을 달았다. 사진 하나씩을 펼쳐 보이면서 그날, 그 순간 그가 왜 거기 있었으며 무엇이 그로 하여금 셔터를 누르게 했는지 짧은 글로 풀어낸다. 설명 없이 전시장에서 만났다면 “잘 찍었네” “멋있군”이란 짧은 말로 휙 지나쳤을 수도 있는 사진들에 글로 새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진가가 특정 장면을 포착하며 상상했던 스토리와 실제 이야기가 얼마나 다른지 엿보는 재미도 있다. 1947년작 ‘쉐 막스, 조앵빌’. 작가는 일요일 오후 술집 앞에서 두 아가씨를 양쪽에 끼고 신들린 듯 춤추는 청년을 카메라에 담았다. 음악이 끝나고 사진기를 접고 나서야 저자는 그가 외다리였다는 걸 깨닫는다. 먼 훗날, ‘오른쪽 아가씨’로부터 편지 한 통이 날아온다. 사진 가운데 청년은 그날 함께 춤 춘 이후 다시는 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슬쉬르라소르귀’ ‘노장쉬르마른’ 같은 낯선 프랑스어 고유명사가 아니라면 번역서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각각의 주석은 쉬운 단문들로 이뤄졌다. 상징과 비유의 멋을 부리지도 않는다. 잘 읽힌다. 행간이 깊다. 저자의 휴머니즘적 감성이 묻어난다.
로니스는 사진관 집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카메라를 들고 파리 곳곳을 탐색했다. 후에 사건 현장을 누비며 르포 사진작가로 활약했다. 1950년대에는 프랑스 사진가로는 처음 미국 ‘라이프’지 사진기자로 일했다.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나다르상,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2009년 9월, 99세로 세상을 떴다.
“내 인생은 실망으로 가득 차 있으나 커다란 기쁨도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이런 기쁨의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 삶이 슬그머니 아는 척을 해오면 감사하다. 우연과의 거대한 공모가 있다. 그런 것은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머리에 꽂은 핀처럼 사소한 상황들. 바로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바로 뒤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늘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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