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의 독창적인 문화라는 것이 초가와 지게 외에 다른 게 있는가. 다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것 아닌가.”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외국학자로부터 한국만의 독창적인 문화와 철학의 부재를 비꼬는 말로 들었던 것 중 가장 충격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최근 문화부 우수도서로 선정된 ‘한국철학사전’(동방의 빛)을 편찬하는 씨앗이 됐다.
이 교수를 포함한 한국철학사전 편집위원들은 15일 서울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문화부 우수도서 선정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적 사상과 철학의 기초가 되는 용어와 인물, 저술을 정리한 한국철학사전을 소개했다. 한국철학사전은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과도 구별되는 한국만의 독창적인 개념들을 정리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의 철학사전은 서양철학을 위주로 간단한 개념 정리를 한 것이 일반적인 형태였다. 표제어 216개를 각각 3000∼3600자 분량으로 다루면서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점과 계보학적인 흐름을 짚었다.
전문가 34명이 2008년 말에 시작해 올해 7월에 작업을 마쳤다. 저자들은 한국철학의 알갱이들을 고대한국사상, 불교철학, 유교와 실학철학, 민족종교와 도교철학, 그리스도교철학, 근대수용기 및 현대한국철학 등으로 분류했다. 책을 기획하고 종합한 편찬위원은 6명. 단군사상과 민족종교는 김용환 충북대 윤리교육과 교수, 고대 사상과 삼국시대 사상은 이도흠 교수, 불교철학은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김천학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장, 유교와 실학철학은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기독교 사상은 이정배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가 맡았다.
표제어는 그 자체로 한국철학의 기초가 된다. 심의 기준을 통과한 용어는 신명(神明), 천인무간(天人無間), 돈오점수(頓悟漸修),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자속(自贖)적 구원 등 78개, 인물로는 원효, 이색, 유영모 등 79명, 저술로는 계원필경, 대승기신론소·별기, 성학십도 등 59개였다.
이도흠 교수는 가장 인상 깊은 한국적 개념에 대해 ‘신명’을 꼽았다. 그는 “신명은 어떤 계기를 통해 내 몸 안에 신기(神氣)가 들어와 사람 안의 기운과 합쳐져서 고도로 흥분된 상태로, 이것이 흥으로 표출되면서 정(情)과 한(恨)이 하나로 어우러져 모든 대립과 갈등이 해소되고 미적으로도 지극히 아름답고 멋지게 되는 기운”이라고 말했다. 그러곤 “한국인은 이 신명이 생활 속에 녹아 있다가 수시로 표출된다. 명절이나 축제 때만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중국이나 서양과 다른 문화를 가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기동 교수는 하늘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는 천인무간을 한국 유학의 핵심 사상으로 소개했다. 이정배 교수는 “서양과 달리 한국 기독교에는 ‘자속적 구원’의 개념이 있다. 이는 ‘나도 예수와 같은 삶을 살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하늘과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천인무간 정신과도 닿아 있다”고 말했다.
34명의 저자들은 서문을 통해 “열린 보편성의 지평에서 한국 철학의 고유 자질을 드러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할 일이었다”고 한국철학사전의 필요성과 의의를 밝혔다. 이들은 한국철학사전을 일본어와 영어로도 출간해 다른 나라 학자들에게도 알릴 예정이다. ■ 한국철학사전에 실린 주요 표제어와 내용
○ 신명(神明)
신기(神氣)와 사람의 기운이 합쳐져 고도로 흥분되는 상태. 한국인은 신명을 통해 정(情)과 한(恨), 대립과 갈등을 하나로 어울러 해소한다. 일체감을 느끼도록 하는 월드컵 응원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 천인무간(天人無間)
‘하늘과 사람이 사이 없이 하나’라는 뜻. 하늘과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만물일체 사상과 통한다. 목은 이색에 의해 한국 유학의 핵심 사상이 됐고, 권근, 이언적, 이황 등으로 이어진다.
○ ‘자속(自贖)적 구원’
스스로 죄를 면제받아 구원에 이른다는 개념. 이 개념을 만든 다석 유영모는 예수만이 하느님의 독생자가 아니라 하느님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인간은 누구나가 외아들일 수 있음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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