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젊은이, 이순신-임경업의 검명을 읽어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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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9일 03시 00분


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보물 제326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장검. 어른 키보다 훨씬 큰 두 자루의 칼에는 댓구를 이루는 검명이 아로새겨져 있다. 충무공이순신 기념관 제공
보물 제326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장검. 어른 키보다 훨씬 큰 두 자루의 칼에는 댓구를 이루는 검명이 아로새겨져 있다. 충무공이순신 기념관 제공
갓난아이 품고 돌아가는 여제자의 뒷모습을 배웅한 뒤, 도검(刀劍)에 미친 친구 조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명(劍銘)을 쓰기 전에 허락을 받아둘 겸, 자료를 보내 달라 부탁할 겸해서였다. 칼 미치광이인 그는 무(武)의 목표를 주저 없이 ‘살(殺)’로 규정하는 무사이자 칼에 관한 글이라면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는 듯 여기는 마니아이다.

도, 검, 무, 지과위무

글자 모양을 따른다면 외날로 쓰는 칼을 도(刀)라 하고 양날로 쓰는 칼을 검(劍)이라 한다. 도는 휘어진 칼등 앞쪽으로 붙은 칼날을 그린 상형문자다.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나 과일을 깎는 과도(果刀)는 모두 한쪽 날을 사용하는 칼이다. 검(劍)은 바르다는 뜻의 첨(僉)과 도()가 합쳐진 형태이다. 양날을 사용해야 하는 까닭에 좌우 대칭의 반듯한 모양이 일반적이다.

난 도보다 검을 좋아한다. 도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 칼날로 상대를 겨냥하는 자세가 베어 없애겠다는 결의를 짙게 풍긴다. 반면에 검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상대를 겨냥해도 한쪽 날은 자신을 향해 있다. 적과 내가 동시에 칼날을 마주한 형국이니 칼을 다루는 마음이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정조는 자신의 정예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을 움직일 때 ‘지과위무(止戈爲武)’라는 인장을 사용했다고 한다. ‘창(戈·전쟁)’을 ‘멈추게(止)’ 하는 것이 ‘무(武)’의 정신임을 인장에 새긴 것이다. 이 도장은 무력을 쓰는 것과 무력을 저지하는 것의 균형을 상징한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에 웬 칼이

무(武)의 표상인 도검은 다툼과 싸움의 주인공이자, 복수와 전쟁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화가 김홍도는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라는 그림에 칼 한 자루를 크게 그려 놓았다. ‘씨름’ ‘서당풍경’ 등의 풍속도를 그렸던 그가, 당비파를 켜고 풍류를 즐기는 자화상 같은 화면에 왜 하필 칼을 그렸던 것일까.

그림 속의 칼은 도가 아니라 검이다. 당시 유행했던 일본도(日本刀)를 그렸다면 난 아마 섭섭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유명한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인상(李麟祥)의 ‘아집도(雅集圖)’에도 화면 속 탁자 위에 검 한 자루가 놓여 있다. 두 그림 속에는 문인의 아취(雅趣·고아한 정취 또는 그러한 취미)를 연상시키는 악기, 서책, 문방사우, 골동품 등이 그득하건만 왜 결이 다른 검이 빠지지 않았을까.

조선 후기는 도검이 유행했던 시대였다. 그럴 만했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뒤에 문약(文弱)함에 회의를 느끼고 상무(尙武)의 기상을 우러르는 감성이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18세기부터는 사람들이 골동 취향으로 도검을 모으는가 하면 팔도 요로에서 검무(劍舞)가 유행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27세에 요절한 천재 역관(譯官) 시인 이언진은 “우습다, 가난이 뼈에 사무치건만, 도자기나 명검을 위해 옷을 벗어 바꾸나니(自笑先生貧到骨, 古瓷良劒解衣求)”라 했던 반면, 같은 역관 문인 장혼(張混)은 꼭 갖추고 싶은 물건 80가지 중에 두 번째를 고검(古劍)으로 꼽았다. 신분적 멍에가 무거웠던 중인들에게 검의 정서적 호소력이 강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칼집 속에서 우는 칼은 그들 자신의 모습이었을 터다.

난세의 검명과 성세의 검명

임진왜란 발발 2년 뒤인 1594년 4월. 장인 태귀련(太貴連)과 이무생(李茂生)이 날카로운 칼을 만들었다. 천 번, 만 번의 담금질을 거쳐 완성된 칼의 주인은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장군은 197cm에 달하는 두 개의 장도(長刀)에 다음과 같은 검명을 나눠 새기게 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파랗게 떨고)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1636년 병자호란이 다시 조선을 덮쳤다. 비운의 장수가 된 임경업은 27세(1620년)에 백두산에 갔다가 맞싸우는 교룡(交龍)을 활로 쏴 죽이고 쇳덩이를 얻었다. 그리고 그 쇳덩이로 검을 만들어 이렇게 새겼다고 한다.

“석자 용천검에 만권의 책을 읽었으니, 저 하늘이 나를 낳은 뜻은 무엇이랴? 산동 땅에서 재상 나고 산서 땅에서 장수난다 하지만, 저들이 장부라면 나도 또한 장부다(三尺龍泉萬卷書 皇天生我意何如 山東宰相山西將 彼丈夫兮我丈夫).”

중국 산동에서 재상 나고 산서에서 장수가 난다 해도, 그들에게 무엇 하나 꿀릴 것 없다는 문무겸전의 강기(剛氣)가 이 검명의 핵심이다.

난세의 영웅들은 대체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장수는 전세가 기우는 순간에 삶의 끝을 예감하는 법이다. 하지만 무사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매일 전쟁을 치른다. 자신과 싸우지 않는 하루가 없다.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는 드물지만, 유혹은 여기저기서 불쑥 다가온다. 맞서지 않을 수 없다.

남명 조식의 가르침은 후일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칼을 차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칼에는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 바깥을 결단케 하는 것은 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단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검에다 ‘덕이 쇠해진다면 내 비뚤어진 욕망을 잘라내다오’라고 소망한 사람(박세채)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도검을 만들 때 주문을 외며 ‘하늘의 뜻을 받아 영영 사악한 것을 제거하리라’(造劍式·조선시대 도검 제작법)라고 외쳤다고 한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명검들을 꺼낸다. 어떤 이가 무쇠도 삭둑 자르는 검으로 상대를 벴다. 기세양양. 다음 사람이 칼을 휘익 젓자 상대는 베인지조차 모르다가 한참 뒤에 쓰러졌다. 기고만장.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나섰다. 칼을 빼는 시늉을 했으나 칼의 나신을 본 사람은 없었다. 베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남은 삶을 살다 갔다고 한다.

싱거운 이야기일까. 그렇지만 나는 심검(心劍)을 생각한다. 죽이지 않고 사람을 길러내는 검도 있었으면 한다. 아이 안고 돌아간 제자가 칼을 품은 조 군의 모습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djk2146@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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