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교수는 이달 말 출간하는 책 ‘인민의 탄생’을 두고 “역사학계와 국문학계에 내는 사회학자의 도전장”이라고 표현했다.
역사학계가 인민의 일상에 총체적으로 주목하지 않았고 국문학계에선 근대 인민이 문예 담론을 통해 인식을 공유하고 행위의 공동체로
성장해간 과정을 들여다보지 못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종승 기자 urisesang@donga.com
텅 빈 어선을 몰고 귀항하는 어부의 마음이 죄스럽듯, 사회문제에 답을 내놓지 못하는 사회학자는 자책감에 빠진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55)의 고백이다. 소통 부재의 시대, 공론장이 기능하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해하던 이 사회학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배워온 ‘미국산 사회과학’을 과감히 벗어던지기로 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망가진 공론장을 설명하려면 우리의 뿌리인 조선 개화기 인민과 시민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4년간 조선의 근대를 항해한 뒤 그가 배에 싣고 돌아온 것은 이달 말 출간되는 책 ‘인민의 탄생’(민음사)이다.
21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송 교수는 “우리 ‘꼬라지’를 잘 보자는 뜻에서 집필을 시작했다”며 “시민사회를 단단히 해야 할 시기다. 공론장의 결함을 보완하는 것이 경제성장보다 급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은 성리학 기반의 강력한 통치체계 덕분에 500년간 꿈쩍도 안 했지만 결국은 무너졌다. 그 원인으로 송 교수는 ‘평민담론장’의 탄생에 주목했다. 이미 양반공론장이 버티고 있긴 했지만 한문을 모르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송 교수는 “훈민정음이 확산되면서 인민들 사이에도 정보가 유통됐고 이것이 평민담론장으로 발전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국문소설 등을 통한 문예담론장, 천주교 교리서와 교우촌을 기반으로 한 종교담론장, 그리고 정치담론장으로 구분했다. 조선의 통치체계를 깨고 인민을 중세에서 근대로 이끈 관문이 바로 이러한 담론장이었다는 것. 담론장은 동학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이고 발전된 형태로 나아갔다.
1890∼1910년 인민들의 자발적 결사체가 400∼500개에 이르는 등 이미 인민은 공익을 염두에 둔 ‘시민’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형성된 공론장은 당시 이념적 혼란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폐쇄됐다는 게 송 교수의 설명이다.
송 교수는 “현재 한국의 공론장은 전혀 건강하지 않은 ‘불통사회’”라고 꼬집었다.
“민주화 초기엔 정치민주화가 급했으니 사회적 합의를 위한 국민들의 동의 기반이 넓었어요. 노무현 정부 이후 사회민주화가 쟁점이 되면서 넘쳐나는 이념과 가치 갈등을 동반하게 된 거죠. 합의의 토대가 되는 공유가치의 면적이 좁아졌고, 합의를 주도할 ‘교양시민’이 결핍돼 공론장에 균열이 생긴 겁니다.”
그는 구한말 유길준이 시민의 양대 요건으로 든 ‘권리’와 ‘도리(의무)’를 언급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들은 그동안 잃어버린 ‘권리’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대신 ‘도리’를 다하는 교양시민의 덕목을 익히지는 못했다”는 해석이다.
송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대안 공론장이 되기엔 아직 이르다고 전망했다. 개화기 인민들이 주막집에서 소문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소문에 살을 붙이고 극적요소를 보탰듯이 ‘필터링 기제’가 없는 이야기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이런 문화에 SNS라는 첨단기술이 접속하니 괴담이 돌죠. 불확실한 소문의 증폭을 걸러줄 필터링 기제는 개인의 자기통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이는 교양시민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이어 송 교수는 “한국의 공론장이 서로의 이견을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제 기능을 하려면 토론과 합의의 기반이 되는 우리 사회의 공유가치를 확대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송 교수는 이 책의 후속으로 인민이 시민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담은 ‘시민의 탄생’을 2년 뒤 출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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