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대표 극단 중 하나인 ‘백수광부’ 출신 극작가 겸 연출가 이해성 씨는 “내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배우 6명을 모아 최근 극단 ‘고래’를 창단했다. 창단 공연으로 준비한 작품은 2009년 ‘연예계 성 접대 비리’를 폭로하고 자살한 연기자 장자연 씨 사건과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모티브로 엮어 사회성 강한 메시지를 풀어낸 연극 ‘빨간시’.
이 씨는 이 작품 대본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기금에 지원 신청서를 냈다. 하지만 이 기금은 사후 지원 방식이라 어차피 이 공연의 예산과는 관계가 없다. ‘고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공연을 강행하기로 했다. 배우 12명을 무보수 출연 조건으로 섭외한 것이다.
한 달 반의 연습 기간과 한 달 공연에 배우들이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지만 이 공연의 예상 손익계산서(표 참조)는 참담하다. 창작 지원금 없이 대학로에서 정통 연극을 공연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요즘 연극계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연장은 대학로 외곽에 있어 임차료가 저렴한 70석 규모의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로 잡았다. 총제작비는 한 달 대관료(약 700만 원), 무대 제작(500만 원), 조명, 음향, 오퍼레이터 등 스태프 15명 인건비(1500만 원), 조명 설치비(90만 원), 의상 제작(200만 원), 기획 홍보비(800만 원) 등을 합쳐 4290만 원. 출연 배우 12명에게 정상적으로 출연료를 줄 경우 드는 2400만 원(1인당 평균 200만 원)을 빼고 지인에게 충무로 퇴계로의 빈 사무실을 무상으로 빌려 연습하는데도 이 정도다.
반면 입장 수익은 어떨까. 전체 23회 공연 동안 유료 관객으로 객석을 다 채운다고 가정해도 2415만 원. 사실 대학로에서 정통 연극의 경우 평균 유료 객석 점유율이 높아야 50%임을 감안할 때 사실상 불가능한 수익이다. 공연을 강행하면 수천만 원의 손해가 눈에 빤히 보이는 상황. 이 씨는 “무모하다고 다 말렸지만 공연을 통해 하고 싶은 얘기는 해야겠다. 돈 벌려고 연극하나. 공연의 질을 높이는 데 모든 에너지를 다 쏟겠다”고 말했다.
연극계의 힘든 상황은 전국이 비슷하지만 요즘 서울 연극계 상황은 특히 심각하다. 공연예술 창작기금 지원의 대부분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와 서울시 산하 서울문화재단을 통해 이뤄진다. 문제는 예술위 지역협력형사업의 서울 지역 배분금액 비율이 2009년 38.4%→2010년 24.6%→2011년 15.7%로 급감하면서 지원 건수가 줄었기 때문. 서울문화재단의 공연 창작활성화 취지로 지원하는 연극 작품은 2009년 116건(23억1200만 원)에서 올해 62건(11억3000만 원)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건당 평균 지원액도 1800만 원 정도라 최근 10년간 상승 추세인 대학로의 소극장 대관료를 간신히 해결하는 수준이다.
지원금을 못 받으면 공연을 못하고 지원금을 받아도 손해 보는 상황에서 정통 연극은 크게 위축되고 있다. 극단이 공동으로 극장을 운영하거나 배우 출연료를 줄이기 위해 2인극이 많아지는 것도 이런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 대신 코믹물과 뮤지컬, 성인물 등 상업공연은 득세한다.
‘빨간시’에 배우들이 무보수 출연하기로 한 데는 이런 현실에 대한 오기도 작용했다. 주인공 ‘할미’ 역의 강애심 씨는 “연극판이 원래 돈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다. 요즘 큰 제작사가 만드는 공연엔 사람 냄새가 안 난다”고 말했다. ‘염라’ 역의 배우 유병훈 씨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연극에 목말랐다”고 말했다. 공연은 12월 10일부터 내년 1월 1일까지. 1만∼2만5000원. 010-9331-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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