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帝政) 로마시대 네로 황제의 개인교사이자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활약한 세네카는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약해지자 물을 채운 공(水球儀·수구의)을 통해 글을 읽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글 읽을 줄 아는 노예에게 책을 읽게 했다. 안경이 없던 시기에 그가 찾았던 궁여지책이다.
하지만 안경은 14세기에 이르러 무수히 많은 그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림에 등장하는 안경은 존경의 표시였다. 주인공이 안경을 들고 있거나 착용하고 있는 모습은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대의 실력자나 주요 인물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 뒤 300여 년이 흐른 17, 18세기에는 기술의 발달로 안경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다. 자연히 값도 싸져 누구나 안경을 살 수 있게 됐다. 이제 단순히 안경을 갖고 다니거나 쓰는 것만으론 차별화가 어려웠다. 스타일에 따른 계급화가 진행됐다. 금과 은, 수정으로 만든 안경테가 나왔다. 안경 케이스도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했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장한 ‘구분 짓기’가 디자인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안경은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 됐다. 안경은 ‘본다’는 본래 가치에서 나아가 ‘보이는 것’의 하나로 진화했다.
대중 속으로 들어온 명품 안경
국내 안경 시장도 마찬가지다. 안경은 ‘학식’의 상징에서 대중적인 ‘시력보조 도구’를 거쳐 패션 아이템이 됐다. 특히 남성 명품 안경 시장은 패션시장 성장과 더불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안경도 패션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질샌더, 펜디 등 국내에 수입 명품안경 브랜드도 많아지면서 명품안경은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뿔테 썼다가, 메탈 썼다가… 파티 분위기 확 바꿔봐!
‘칼 라거펠트’의 2011년 가을겨울 컬렉션. ‘KL188’(왼쪽)과 ‘KL733’모델. 룩옵티컬 제공취급하는 매장도 적고, 값도 비싸 시장 자체가 작았던 게 불과 10년 전이지만 지금은 그때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명품 안경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중반부터다. ‘펜디’와 ‘캘빈클라인’ ‘칼 라거펠트’를 비롯해 ‘마이클 코어스’ ‘질샌더’ 등 명품 브랜드의 안경이 경쟁적으로 들어왔다. 제품 디자인도 다양해졌다.
연예인 등 유명인사들이 패션 소품으로 안경을 쓰는 모습이 자주 노출되면서 대중화에 불을 지폈다. 배우 김주혁, 류승범 씨가 즐겨 쓰는 미국 브랜드 ‘모스콧’은 신세계백화점 명품 안경 매장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을 정도다.
명품 안경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주로 선글라스를 팔았던 백화점과 면세점도 별도의 전문 매장을 두는 등 판매 채널을 늘렸다. 명품 브랜드 안경을 국내에 유통하는 룩옵티컬에 따르면 올해 들어 10월까지 명품 안경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 늘었다.
백화점과 면세점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한정판 제품인 ‘하우스 브랜드’ 안경도 주목받고 있다. 명품 브랜드 안경보다 더욱 차별화된 안경을 원하는 고객이 생겨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의 안경점들이 하우스 브랜드 안경테의 유행을 주도하고 있는데, 이 업체들은 유명 연예인을 활용한 스타 마케팅으로 유행에 민감한 젊은층을 공략하고 있다. 국내에는 ‘올리버피플’ ‘린드버그’ 등 20여 개 하우스 브랜드가 수입되고 있다.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CEO)가 착용해 유명해진 독일의 ‘르누’도 이런 하우스 브랜드 가운데 하나다.
남성 명품 안경이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브랜드도 속속 국내 상륙을 준비하고 있다. 이탈리아 패션 기업 모조토의 고급 브랜드 가운데 하나인 ‘말보로 클래식’은 내년 1월 메탈 소재의 명품 안경인 ‘시티’ 라인을 국내에서 처음 선보일 계획이다. 말보로 클래식은 화려한 색채를 강조하는 이탈리아 패션과 심플함을 강조하는 미국 패션의 조화가 특징인 브랜드로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 전 세계 32개 나라에서 마니아층을 갖고 있다.
‘리덕셔니즘’과 ‘매스 엘리티즘’
본격적인 대중화 시대로 접어든 명품 안경의 최근 트렌드는 ‘리덕셔니즘’이다. 기존 관습과 패턴을 벗어나 색채와 디자인적 요소를 최대한 절제하는 리덕셔니즘이 의류에서 나아가 안경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메탈 소재로 남성과 여성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캘빈클라인의 ‘CK7291K’나 심플한 디자인에 서로 대조적인 색상을 섞어 매치한 펜디의 ‘F865’ 등이 대표적이다. 이와 더불어 ‘가장 적은 것이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란 철학을 바탕으로 기본 뿔테 디자인에 메탈을 적절히 넣어 세련된 느낌을 강조한 질샌더의 ‘JS2660K’ 등에서도 리덕셔니즘을 읽을 수 있다.
적당한 가격대의 브랜드로 인기를 얻으려는 ‘매스 엘리티즘’도 최근 명품 안경 시장의 특징이다. 하이엔드 시장에서 고가 브랜드를 만드는 대신 합리적인 가격대의 브랜드를 론칭하는 패션업계의 특성이 안경 시장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실용적이면서도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이런 브랜드에 대한 수요는 날로 늘고 있다. 샤넬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와 셀린느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이클 코어스가 각각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든 디자이너 브랜드 안경의 올해 1∼10월 국내 시장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정도 늘었다.
펜디 F912K패션의 완성은 소품
하지만 무조건 유행을 좇는다고 좋은 스타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패션의 완성은 소품’이란 말처럼 안경 역시 때와 장소에 맞게 골라야 한다. 특히 남성들은 정장을 주로 입기 때문에 자신의 개성과 취향만 고집하다 보면 어울리지 않거나 격식에 어긋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블랙과 브라운 색상의 스퀘어형 뿔테안경은 정장이나 캐주얼 재킷 등 어떤 옷차림에도 어울려 무난한 선택이 될 수 있다. 뿔테안경은 지적이고 부드러운 인상도 준다. 반면 메탈 소재로 된 안경테는 깔끔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뿔테나 메탈 소재를 번갈아 착용하면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
안경은 단점을 보완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강한 인상을 가진 사람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부드러운 라운드형에 갈색 계열의 안경을 쓰면 강한 이미지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 얼굴이 마른 사람은 신경이 예민해 보이고 날카로운 느낌을 줄 수 있어 밝은 색상 계열의 뿔테안경을 선택하는 게 좋다. 반대로 얼굴이 통통한 사람은 뿔테안경보다는 메탈 안경으로 상대방에게 샤프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좋다.
이용수 룩옵티컬 연구개발(R&D)센터 실장은 “안경은 이제 패션 아이템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며 “자신의 스타일과 개성을 최대한 부각하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는 명품 안경을 쓰면 한층 스타일리시한 패션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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