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내 인생을 바꾼 공간]건축가 승효상, 달동네 골목길서 사람냄새 나는 공간을 찾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건축가 승효상의 유아시절 집

세계적 건축가들은 60세가 넘어서 희대의 명작을 남기곤 했다. 승효상이 자신을 아직도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그의 일터 ‘이로재(履露齋)’에서 그가 카메라를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세계적 건축가들은 60세가 넘어서 희대의 명작을 남기곤 했다. 승효상이 자신을 아직도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그의 일터 ‘이로재(履露齋)’에서 그가 카메라를 삐딱하게 쳐다보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아홉 살 누나는 우는 세 살배기를 업고 좁은 마당을 맴돌았다. 갓 태어난 여동생이 엄마 젖을 독차지하는 게 심통이 나서 몇 대 쥐어박았다. 엄마한테 된통 혼난 뒤끝이었다. 일곱 세대가 한데 모여 살던 그 집 마당에는 변소가 하나, 우물이 하나였다. 아침에는 일을 본다, 세수를 한다, 북새통이 따로 없었고, 저녁에는 아낙네들이 쌀을 씻는다, 일터에서 돌아온 남정네들이 발을 씻는다, 요란뻑적지근했다. 빨래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찐 감자를 나눠 먹었다. 무슨 사연인지 울고 계신 어머니를 이웃 아주머니가 위로하기도 했다. 부산 서대신동 3-184. 대문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조그만 문이 항상 열려 있던 50여 년 전의 그곳. 건축가 승효상(59)을 지금껏 지탱하는 공간이다. 》
○ 김수근을 이겨라

“오늘부터 철야 좀 할 수 있겠어?” 1974년 12월, 처음 출근한 대학 졸업반 승효상을 보자마자 김수근 선생(1931∼1986)이 말했다. 이미 한국 건축의 대가 반열에 오른 선생에게는 일감이 넘쳤다. 이후 3개월 동안 승효상은 선생의 건축사무소에서 숙식하며 일했다. 이듬해 2월 26일 졸업식날도 해가 중천에 뜨도록 까맣게 잊고 있다 허둥지둥 학교에 갔지만 이미 끝난 뒤였다. 세상과의 절연이 시작됐다.

선생의 문하(門下)에 있던 15년(생전 12년, 사후 3년)간 승효상의 목표는 오직 하나, ‘김수근 건축을 이겨라’였다. 선생이 설계 주문을 하면 그 주문을 훨씬 뛰어넘는 걸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온 신경을 쏟았다. 선생이 퇴근하면서 어떤 도면을 10장 그리라고 하면 승효상은 10장을 완성한 뒤 밤을 새워서 다른 아이디어로 또 다른 10장을 그렸다. 이튿날 선생이 출근하면 지시한 10장을 보여 드린 뒤 “이런 것들도 있을 수 있다”며 다른 10장을 보여 드렸다. 이런 식으로 스승에게 끊임없이 싸움을 걸었다.

“철저한 패배의 연속이었어요.” 승효상이 제시한 다른 10장의 도면을 놓고 스승과 제자는 토론을 벌였다. 스승은 “아, 이건 안 돼” 하면서 각 도면이 왜 불완전하며 성립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아주 논리적으로 설명해줬다. 김수근 선생은 어쩌면 ‘계몽적 전제군주’였다. 엄청난 카리스마로 독재자 소리를 들어가며 일을 지휘했지만 제자들과의 학습, 토론, 대화,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승효상의 패배는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지속됐다. “한 번은 이기고 싶은데 한 번도 못 이긴 거죠.”

그렇게 집요하게 도전하는 승효상을 스승은 아꼈다. ‘김수근 건축’에 푹 빠져 버린 제자가 밉지 않았을 터다. 입사 2년차인 그에게 중요한 프로젝트의 수석디자이너를 맡겼다. 한참 아래 후배에게 밀린 실장은 사무소를 나갔다. 승효상은 스승의 의중에 점점 더 가까이 가게 됐다. 10년이 지났을 쯤, 그의 도면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오케이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어떻게 보면 김수근 건축에 제 스스로를 가둔 셈입니다. 그걸 진리라고 생각하면 자유로우니까, 그 안에서 마음껏 논 거지요.”

‘아, 내가 김수근 건축을 가장 잘할 수 있구나’ 하는 자만감이 차오를 무렵 스승은 세상을 떠났다. 스승의 유언에 따라 선배 건축가 장세양(1947∼1996)과 사무소를 이어 받았다. 발길을 돌리려는 건축주들을 “내가 김수근보다 더 김수근 건축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3년을 더 보내니 머리는 공허해졌고, 지식은 공소(空疎)해졌으며, 마음은 다급해졌다. 이제는 ‘승효상의 건축’을 하고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무소를 나왔다.

○ 공간의 풍경


막막했다. 1989년 12월 독립해서 건축사무소를 차렸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자기 건축의 독창성에 의심이 들어 뛰쳐나왔건만 도대체 ‘승효상의 건축’이 뭔지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 15년간 나 스스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깊은 고민에 빠져 들었다.

운 좋게도 학연으로 똘똘 뭉친 건축계에서 이를 거부하는 또래의 건축가들이 모여 만든 ‘4·3그룹’에 참여하면서 ‘승효상 건축’을 서서히 탐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건축을 하는지 알게 됐다. 그들의 정체성은 그들이 자라온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걸 짐작하게 되던 1992년 어느 날이었다.

승효상은 다른 일을 보러 가는 길에 서울 성동구 금호동 달동네를 가로지르게 됐다. 길을 걷다 무슨 생각에 가만 돌아서 보는데 마음이 편안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이상한 마음에 골목을 들어가 보니 그 풍경이 너무나 정겹고 익숙한 것이었다. ‘왜 이렇게 익숙할까?’ 길이라고 하는 게 통행로만이 아니라 어린애들이 노는 놀이터가 되고 아낙들이 모여 두런두런 얘기를 주고받는 회의장도 되고…. “그 길에 아주 재미있는 공간들이 즐비한 거예요. 길에 줄줄이 엮인 동네 공동체가 하나의 스토리처럼 들려왔어요. ‘이건 정말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지요.”

달동네, 그 공간의 익숙함에 대해 고민하던 중 불현듯 어릴 적 생각이 났다.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부산에서 전전했던 12곳의 집들을 떠올리며 부리나케 스케치했다. 그가 살았던 공간의 추억이 모두 달동네와 조금씩이라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특히 비탈길에 서 있던, 3세부터 3년여를 살았던 그 집의 기억이 강렬했다. ‘이게 내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구나.’ 김수근 건축하고 다른 뭔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김수근은 우리나라 최초로 건축의 본질이 건물의 형태에 있지 않고 공간(空間)에 있다는 것을 주창했다. 건물을 어떻게 예쁘게 짓느냐가 아니라 공간을 어떻게 아름답게 조직하느냐에 건축의 생명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위대한 발견이었다. 승효상은 공간의 풍경에 주목했다. 그 공간에서, 공간을 통해서 사는 인간들이 빚어내는 풍경. 동시에 시대에 대한 자각이 그의 건축에 스며들었다. 물신(物神)이 팽배한 이 시기에 만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은 ‘빈자(貧者)의 미학’이라는 건축철학을 낳았다. 그는 유아기를 보낸 그 집에서 ‘승효상 건축’의 원형(原型)을 체험한 것이었고, 그만큼 확신을 갖게 됐다.

“달동네에서 발견되는 어쩔 수 없는 공동체적 공간을, 여유 있는 사람들이 집이나 건물을 지으면서 자발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처럼 사람 냄새 풍기는 공간을 만드는 게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건축이란 생각이었다.

○ 승효상의 알


승효상은 지금 알 속에 있다. 김수근이란 알을 깨고 나와서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알에 스스로를 가뒀다. 이제 빈자의 미학을 발표한 지 20년째다. 그 안에서 그는 자유롭다. 그리고 알의 외연을 조금씩 넓혀 왔다. 스스로도 많이 넓어졌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결코 스승을 이겼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스승이 돌아가시면서, 이기고 싶었지만 이제는 이길 수가 없는 상태가 돼 버렸다. 그는 스승에게 지금도 콤플렉스를 느낀다고 했다. 넘을 수 없는 그와 스승의 차이, 확실한 사제(師弟) 관계는 영원히 사라질 수 없게 됐다. 아쉬움이 많지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스승을 넘는 제자가 있다면 스승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지만 굉장히 쓸쓸할 것 같아요.” 문득 자신감이 엿보인다. 어느새 스승의 나이를 넘어선 승효상. 하늘에서 김수근이 그를 보고 뿔테안경 너머로 씩 하고 미소 짓는 듯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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