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귀 멀고 눈 멀어도 너희는 조선의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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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3시 00분


◇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정창권 엮음·지음/2만9800원·568쪽·글항아리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그림 ‘병신’의 일부(왼쪽)와 ‘소경문수’. 조선시대 장애인들은 지금보다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웠고 궁핍할 때는 집단으로 임금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글항아리 제공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그림 ‘병신’의 일부(왼쪽)와 ‘소경문수’. 조선시대 장애인들은 지금보다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웠고 궁핍할 때는 집단으로 임금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글항아리 제공
‘병신(病身).’ 조선 말기 풍속화가 김준근의 그림 제목이다. 다리 하나가 없는 지체장애인, 한쪽 팔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 키가 작은 왜소증 장애인, 허리가 굽은 척추장애인을 묘사했다. 과거 민간에서는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불렀다. 이 무심하게 내뱉는 단어만으로도 옛날 장애인은 얼마나 고달프게 살았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나 짐작과 달리 과거에는 장애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오히려 덜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장애인이 비교적 자유롭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유몽인의 설화집 ‘어우야담’에는 다리 하나가 짧은 지체장애인을 가리킬 때 마땅히 ‘다리 하나가 길다’고 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도 ‘사소절’에서 어린이들이 장애인을 대할 때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썼다. 우리 땅에서 장애인을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근현대부터라고 저자는 말한다.

장애인은 사회활동, 취업, 승진, 교육 등에서뿐 아니라 역사 서술에서조차 소외되기 쉽다. 현재 국내 등록장애인은 약 250만 명에 이르지만 장애인의 역사에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다. 사회적 약자의 역사를 연구해온 저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는 역사와 문학, 회화, 음악, 법률, 풍속 등에 나타난 장애인 관련 기록을 꼼꼼히 갈무리했다.

옛날 국가 주도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오늘날에 시사점을 준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직접 주관해 장애인들에게 잔치를 열고 생필품을 내렸다. 조선시대에 부역은 백성의 의무였지만 장애인에겐 면제됐다. 세종은 장애가 있는 백성들에게 거의 매년 쌀을 하사하는 등 장애인 복지에 관심을 가졌다. 고려와 조선 모두 늙은 장애인이 혼자 살 경우엔 장애인 도우미라 할 수 있는 부양자까지 지원했다.

저자는 조선 전기의 시각장애인 독경사(讀經士·경을 읽어 악귀를 몰아내는 직업) 단체인 ‘명통시’를 언급하며 이는 세계 최초의 장애인 단체라고 평가한다. 명통시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나라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는 공적단체였다.

장애인이 직업을 갖고 먹고살기도 어렵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의 인사 행정 이론서인 ‘인정’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장님이라도 듣는 데엔 쓸(사용할) 수 있고, 귀머거리라도 보는 데엔 쓸 수 있으며, 벙어리라도 말할 필요가 없는 일엔 쓸 수 있고, 어리석은 자라도 한 가지 전문 분야에는 쓸 수 있다.’

시각장애인들은 주로 점을 치거나 독경, 악기 연주, 그물뜨기, 대장장이 등의 일을 했다. 장애인만을 위한 관직도 있었다. 시각장애인 악공에겐 장악원의 관현맹인, 시각장애인 점술가에겐 관상감의 명과학 자리를 주었다. 능력을 인정받으면 고위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청각장애인 이덕수는 이조판서와 대제학에 올랐고, 간질장애인 권균은 우의정, 지체장애인 심희수는 영부사에 올랐다.

그러나 여성 장애인은 직업을 갖거나 결혼하기 어려워 고달픈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조선 후기 한 여성 중증 장애인이 마흔이 넘도록 혼인하지 못한 것을 한탄한 가사 ‘노처녀가’에서 그 절절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어느덧 늙어지고 측은한 신세 되었구나/시집이 어떠한지 서방 맛이 어떠한지/생각하면 싱숭생숭 쓴지 단지 내 몰라라./내 비록 병신이나 남과 같이 못할쏘냐.’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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