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채, 그 첫 5000년/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정명진 옮김/700쪽·2만5000원·부글북스
‘감자 농사를 짓는 철수는 장화가 필요했어요. 장화를 만드는 영희는 감자가 먹고 싶었죠. 둘은 약속 장소에 나와 감자 한 상자와 장화 두 켤레를 서로 바꾸죠. 그런데 철수는 멧돼지 잡을 활도 필요했죠. 활 만드는 삼식에게 갔지만 삼식은 감자 따윈 안 먹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만든 거예요.’
경제학 수업의 첫 시간 강의는 많은 경우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물물교환과 그 불편에 기인한 화폐의 제작을 인류 경제의 출발로 보는 것이다.
책은 이 오랜 가설이 잘못됐다는 단언으로 시작한다. “경제학 교과서들이 상상 속의 마을로 시작하는 이유는 현실 속의 마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류학자다. 표지에 나오는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란 부제에 ‘경제학만으로도 진저리나는데 인류학자가 경제학을 반박하는 책이라니 얼마나 골치 아플까’라며 독자는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되레 이 지점에서 책의 재미가 나온다. 인류학의 관점에서 경제학이 만들어낸 신화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호주 군윙구족의 독특한 물물교환 의식 ‘차말라그’부터 콩고 렐레족의 ‘피의 부채’, 티브족의 ‘인육 부채’ 개념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인류학 사례를 통해 책상머리 경제학의 지루함과 보수성에 도전장을 던진다.
책은 인류의 경제뿐 아니라 5000년 역사 전체를 이끈 개념이 부채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 경전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죄’와 ‘속죄’의 도덕 개념이 부채 상환 문제에서 출발했고,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천칭에도 부채의 개념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이 주창하는 전형적인 채권-채무의 사슬에도 책은 의문을 던진다. 최소의 노력과 재화로 최대의 보상을 얻으려는 이기적 모습을 인간의 기본형으로 여기는 경제학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이에게 오히려 재물을 요구하는 어떤 부족의 풍습을 비롯해 부모의 아가페적 사랑, 때로 신의와 헌신이 앞서는 인류의 다양한 측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첫머리부터 책은 ‘부채는 반드시 상환돼야 하는가’라는 도전적 화두를 내건다.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세계를 틀어쥔 채 펼치는 ‘죽음의 부채 게임’에 고개만 주억거리지 말자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국,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식민지 개척 시대, 최근 세계 경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례를 들며 역사 속에서 폭력과 압제가 부채라는 개념 아래 정당화돼 왔다고 설명한다. 7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그 핵심은 ‘국가간 부채로 인한 전쟁과 경제 위기의 쳇바퀴에서 다음 5000년은 자유로워지자’는 간결한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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