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전후의 심경 1인 5역 연기 정말로 재미있어요”

19禁 연극 ‘블루룸’서 열연 송선미

자유롭게 장르를 넘나들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는 송선미(35)가 미성년자 관람 불가 연극 ‘블루룸’을 통해 과감한 변신에 나섰다. 결혼 6년차 주부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남편의 든든한 지지가 큰 힘이 됐다.

여배우의 민낯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으로 약속장소에 나왔다. 옷도 편안한 티셔츠 차림이었다. 하지만 늘씬한 몸매와 ‘베이비 페이스’는 결코 감춰지지 않았다.

연극 무대는 이번이 두 번째. 올봄 영화 ‘약속’을 리메이크한 ‘돌아서서 떠나라’로 연극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연기력에서 호평을 받았다. 매회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좀 더 과감한 선택을 했다. 키스신과 베드신을 소화해야 하고, 슬립 차림의 노출도 필요했다.

키스신-베드신 소화, 과감한 변신 시도

고전 ‘라롱드’가 원작인 ‘블루룸’에는 10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거리의 소녀 이렌느와 택시 드라이버를 시작으로 가정부 마리, 학생 안톤, 유부녀 엠마, 정치가 남편 찰스, 모델 켈리, 극작가 로버트, 여배우, 귀족 남자 말콤, 그리고 다시 거리의 소녀 이렌느로 서로 바통을 넘겨받듯 애정 행각을 벌인다. 1998년 영국 런던 초연 당시에는 니콜 키드먼을 비롯해 10개 배역에 10명의 배우가 등장했지만, ‘블루룸’에는 단 2명의 남녀, 송선미(송지유 더블 캐스팅)와 김태우가 이 모든 역을 연기한다. 2인극이면서 동시에 2인극이 아닌, 아이러니한 설정은 그가 작품을 선택할 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1인 5역, 10개의 장면은 연기자로서 꼭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어요. 커플별로 남녀가 만나서 섹스를 하기 전과 후의 심경 변화를 그리는데, 인간의 본능을 표현하는 만큼 솔직하고 재미있어요. 등장인물 10명은 각자 섹스라는 목적을 성취하려고 어떤 때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치한 말로 상대의 환심을 사려 하고, 또 어떤 때는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죠. 그런 장면이 관객에게 코믹하게 다가갈 것 같아요.”

작품을 선택하기 전 키스신과 베드신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터.

“남편도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이번 연극을 하겠다고 하자, 가장 먼저 ‘그럼 키스신은 어떡해?’ 하고 묻더라고요. ‘그냥 하는 거지 뭐’ 했더니 ‘유부녀가 그래도 되는 거야?’ 하고 살짝 눈을 흘겼어요. 하지만 남편은 누구보다 연기자로서 제 삶을 잘 이해해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아요.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를 할 때도 처음에는 캐릭터가 잘 맞지 않을 것 같다고 우려하더니 작품이 끝날 무렵에는 연기가 좋다며 칭찬해주더라고요. ‘앞으로 1년에 한두 편은 꼭 연극을 하라’는 얘기도 해줬어요.”

힘겨운 시간 겪고 자신을 사랑할 용기 생겨

문화콘텐츠 사업가인 남편 고우석(38) 씨는 영화계에서 미술감독으로 활동한 전력이 있다. 두 사람은 2004년 서로 친분이 있는 영화감독의 주선으로 만나 2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는“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남편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만난 지 1년 정도 됐을 때 두 사람이 교제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선을 보라고 권하자 남편이 교제 사실을 밝혔고 이후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결혼하긴 했지만 그때 안 했으면 못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남편과 외모가 비슷해 마트에 장보러 가면 남매인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결혼 후 그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전에는 인생이 혼란스럽고 회의에 빠질 때마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면, 결혼 후에는 소소한 일까지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게 큰 힘이 된다.

그는 사회성이 부족한 탓에 그동안 연예계 생활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철이 없고 못나게 굴었어요. 그러다 보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죠. 평범한 가정에서 조용한 아이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연예계라는 치열한 세계에 들어오자 모든 게 쉽지 않았어요. 나보다 잘난 사람들에게 치이고, 슬럼프에 빠져 허덕이기도 하면서 20대를 보냈어요. 연기 면에서도 아무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다시 배우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철저하게 준비한 뒤에 카메라 앞에 서고 싶어요.”

힘겨운 시기를 잘 견뎌내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한때는 밀어내고 싶을 정도로 힘겨웠던 배우라는 직업을 이제는 가슴 깊이 끌어안게 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일을 사랑하게 됐고 평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포기’라는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했다.

“한마디로 제가 김태희는 될 수 없잖아요(웃음). 포기할 건 포기하고, 현실에 만족하다 보니 행복도 찾아오더라고요. 마음의 여유는 물론이고 일도 즐기면서 할 수 있게 됐어요.”

아기 엄마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

연극 ‘블루룸’의 한 장면.

그는 1996년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2위를 하고 이듬해 드라마 ‘모델’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후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드라마 ‘불꽃’ ‘부모님 전상서’ ‘하얀거탑’ ‘개인의 취향’ 등에 출연하며 주·조연을 넘나들었다. 영화로도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데 2006년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이후 5년 만인 올해 다시 홍 감독의 ‘북촌방향’에 출연해 처음으로 프랑스 칸에 입성했다. ‘북촌방향’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후보로 초청받았다. 그는 영화제에서 시스루 저고리와 검푸른 치마가 조화를 이룬 한복드레스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복드레스는 남편의 아이디어였는데 외신 기자들 사이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송!” “송!” 하고 외치는 카메라 기자들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을 정도.

생애 처음으로 칸 레드카펫을 밟은 그는 칸 영화제를 홍 감독, 유준상과 함께 한 즐거운 여행으로 회상했다. 세계 각국 영화인과 자리를 함께 한 것도 즐거웠지만 달빛 포근한 칸의 바닷가에서 밤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을 여행하면서 추억을 만든 덕분이다.

“준상 오빠가 기타를 워낙 좋아하는데, 오빠가 기타를 사길래 저도 하나 따라 샀어요. 집에 돌아와서 남편한테 자랑했더니 ‘왜 미국산 기타를 프랑스에서 샀느냐’며 의아해하더라고요. 그래서 ‘준상 오빠가 그러는데 한국에 비하면 3분의 1 가격밖에 안 된대’라고 했죠. 그 말에 남편이 인터넷을 찾아보곤 한국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어찌나 허탈하던지 준상 오빠한테 바로 문자를 보냈더니 자기도 속상해서 몇 번째 인터넷을 뒤지는 중이라고 하더라고요.”

반달눈을 하고 해맑게 웃는 그에게 “여전히 아이다운 면이 있다”고 말하자 그는 “순수하단 말인 거죠?” 하며 더 크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니 기존의 도도하고 차가운 이미지 대신 애교스럽고 털털한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다.

요즘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아기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부부 모두 아이 낳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하지만 남편은 여전히 “아이 없이 살면 어떠냐”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둘만 행복하게 살자”는 말을 자주 한다.

“남편은 다른 남자들과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심지어 제가 아기 얘기를 꺼내면 ‘아기 낳으면 금방 늙는다’고 협박까지 해요(웃음). 그러면서 제가 늙는 게 싫대요. 실제로 남편은 제가 피부가 조금 안 좋아졌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지적하고 빨리 피부과에 가라고 해요.”

그는 “연기자로서뿐 아니라 생활인으로서의 삶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자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의 삶이 조화로워야만 연기에서도 그 에너지가 발산될 거라는 생각에서다. 한때는 연기자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려 발버둥 친 적도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인생은 순리대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걸 깨닫고 있다고. 그는 향기가 묻어나는 사람으로 늙고 싶단다.

“배우로서 얻는 뿌듯함과 희열감은 분명 있지만 일 자체가 삶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될 것 같아요. 가족의 화목, 좋은 사람들과의 차 한 잔, 그런 것이 모여 행복을 이루는 게 아닐까요. 주위에 보면 백발이어도 얼굴은 여전히 활기 넘치고 우아하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분이 계시잖아요. 저도 그런 분처럼 커피 향기, 와인 향기가 어울리는 사람으로 나이 들면 좋겠어요.”

김유림 여성동아 기자 mupm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