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붉은 꽃’에 취하고… ‘날선 검’에 정신이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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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9일 03시 00분


◇ 연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

안토니 역의 요시다 고타로(왼쪽)가 주군을 베라는 명령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에로스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안토니 역의 요시다 고타로(왼쪽)가 주군을 베라는 명령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에로스를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공연 시작 전 빨강과 검정 가로줄이 쳐진 무대 막 한가운데에 셰익스피어의 얼굴이 둥실 떠있었다. 말년의 초상화라 늙어 보이지만 그는 53세로 숨을 거뒀다. 이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연출한 연출가는 그보다 23세나 더 먹은 노장이다. 무대 막이 걷혔다. 3면의 벽과 바닥이 모두 흰색인 무대는 역시 흰색 동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마를 상징하는 젖먹이 형제에게 젖을 물린 늑대 동상과 이집트를 상징하는 스핑크스의 동상, 그리고 그리스로마신화 속 주인공의 동상이 즐비했다. 좌우 양쪽 벽 4개의 문이 열리더니 29명의 전 출연진이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 흰색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그렇게 이 연극에 등장할 모든 요소가 관객을 향해 정중한 인사를 건넸다.》
24∼27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펼쳐진 니나가와 유키오의 첫 내한공연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시작했다. 처음부터 손에 쥔 모든 패를 보여주고 나서 카드게임을 펼치듯. 흰색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섰다. 흰색을 숭상했던 백의민족에 대한 경의의 뜻이라지만 역시 기본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결기 같은 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무대는 배우들의 원초적 에너지로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마이크 없이도 배우들의 발성은 3층 객석을 꽉 채웠다. 장문의 대사를 읊을 때도 막힘이 없었다. 극장 밖에서 객석 복도를 전속으로 질주해 무대에 올라선 배우들이 대사를 토해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등장과 퇴장도 전광석화와 같았다. 배경이 이집트일 때는 스핑크스 동상, 로마일 때는 늑대 동상, 제3의 장소일 때 신과 영웅의 동상이 원격 조종으로 빠르게 무대를 교차하는 동안 배우들 역시 거의 뛰다시피 움직였다. 스물아홉이나 되는 배우의 기와 세를 한껏 끌어올리면서도 이를 균일하게 유지했기에 가능한 장면들이었다.

객석 쪽이 넓고 뒤쪽이 좁아 원근감을 극대화하는 평행사변형 무대는 이런 역동성을 강화했다. 이는 특히 안토니우스(안토니) 군과 옥타비아누스 군 양측의 20명도 안 되는 배우들이 짧은 시간 동안 스쳐 지나며 서너 차례 칼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로마의 명운을 쥔 전투의 박진감을 그려내는 장면에서 두드러졌다.

일본 전국시대 군신(軍神)으로 불렸던 다케다 신겐의 병법술에 대한 찬사가 떠올랐다. ‘빠르기는 바람과 같고 조용하기는 숲과 같고 무겁기는 산과 같다’….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예측 불가능한 매력을 뿜어낸 클레오파트라 역의 아란 케이. 그는 이번 내한공연을 염두에 두고 니나가와 유키오가 발탁한 재일교포 3세 연기자다. LG아트센터 제공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마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예측 불가능한 매력을 뿜어낸 클레오파트라 역의 아란 케이. 그는 이번 내한공연을 염두에 두고 니나가와 유키오가 발탁한 재일교포 3세 연기자다. LG아트센터 제공
고대 로마인들 또한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와 그 가신들을 떠올리게 했다. 심지어 안토니가 부하의 도움을 받아 자결할 때 자세는 일본 사무라이의 할복의식을 닮았다.

내용은 원작에 충실했지만 리처드 버턴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동명 영화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타이틀 롤을 맡은 요시다 고타로와 아란 케이 커플은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현대의 유명 스타 커플을 연상시켰다. 사랑의 덫에 걸린 채 파멸해 가면서도 자기애와 허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박장대소를 자아내게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진실을 보고하는 사자를 역적이라고 겁박하면서 귀에 듣기 좋은 허위보고만 일삼는 사자를 충신으로 우대하기 바쁘다. 안토니 역시 클레오파트라가 먼저 자결했다는 거짓보고를 듣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뒤늦게 클레오파트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에 반쯤 넋이 나간다. 부하들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같이 아파서 비명을 질러대는 안토니를 들쳐 메고 1층 객석을 한 바퀴 돌아 클레오파트라에게 데려간다.

그들은 정말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세기의 연인이었을까. 아니다. 천하를 다 쥐고도 사랑 때문에 파멸하면서 결국 마지막으로 내세울 게 그 사랑밖에 없었던 나르시시즘의 화신일 뿐이다. 그래서 안토니가 자결할 때 도움을 청한 시종의 이름이 사랑의 신인 에로스(자막상 이름은 이라스)라는 게 의미심장했다. 에로스는 ‘사랑을 위해 죽다’라는 안토니의 마지막 제스처를 외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니나가와는 이렇게 역사상 최고의 스캔들을 다룬 셰익스피어 극을 인간의 보편적 희로애락이 꿈틀거리는 대중적 드라마로 풀어냈다. 놀라운 점은 이 칠순의 연출가가 전혀 대가연하지 않으면서 젊은 연출가 못지않은 에너지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농염한 미모로 무장을 장악한 아란 케이가 그런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 꽃이었다면, 출중한 발성과 연기로 객석을 휘어잡은 요시다 고타로는 연극은 지루하다는 통념을 베어내는 날 선 검이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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