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가 변덕이다. 한겨울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포근해져 흡사 따사한 해님과 심술궂은 폭풍이 서로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고 경쟁을 벌이는 이솝 우화가 연상되기도 한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기상청에 애꿎은 원망을 하기도 미안하고 어느덧 출퇴근 시간의 트래픽 잼에 익숙해지듯 변덕스러운 날씨가 당연해졌다.
시즌에 민감한 패션계에도 그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여름철 패션 아이템의 대명사인 선글라스가 이제는 봄·가을의 강한 햇살을 견디기 위해 필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는 이들의 공항패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절대지존이 됐다. 쉽게 걸치고 벗기 편하게 겉옷은 경량화됐고 안에 입는 셔츠나 톱은 얇아졌지만 그 기능성은 더욱 향상됐다. 근래 들어 큰 인기를 끌었던 패딩 재킷은 더욱 촘촘하게 누빔 처리가 됐어도 입은 듯 안 입은 듯 가벼워졌고 아웃도어 패션의 소재들은 피부가 숨을 쉬듯 몸 안의 열기는 간직한 채 습기는 밖으로 배출하는 등 예측 불가능한 기후에 그나마 대비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줬다.
전통적으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겨울 크게 두 시즌으로 나눠 패션계에 유행의 흐름을 제시했던 것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프리 스프링(Pre-Spring) 또는 프리 폴(Pre-Fall)이라고 해 크게 둘로 나뉘었던 시즌에서 다룰 수 없었던 간절기 패션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어느 특정 시즌을 겨냥해 그 시즌만을 위한 컬렉션을 서로 경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글로벌 브랜드가 리조트 컬렉션 또는 크루즈 컬렉션을 선보였다. 원래 19세기 말, 20세기 초 디자이너들이 겨울철 추위를 피해 따뜻한 지중해로 크루즈 여행을 떠나는 소수의 상류층 고객에게 그들이 배 안에서, 그리고 도착 후 휴양지에서 즐길 여러 의상으로 데이타임용 캐주얼웨어, 칵테일드레스, 이브닝드레스 등을 제작해줬던 것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제 간절기를 위한 색다른 재미를 주는 미니 컬렉션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필자도 몇 주 전 샤넬의 크루즈 컬렉션에 초청돼 그 재미에 흠뻑 빠질 기회가 있었다. 컬렉션의 제작 스태프이며 무대, 조명, 관객이 앉는 스툴 하나까지도 파리에서 공수해왔고 스텔라 테넌트를 비롯한 슈퍼모델들이 직접 런웨이에 등장해 그 완성도와 수준은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외형적인 화려함보다 더 매력적인 것은 컬렉션 내내 양쪽 벽면에 비친, 마치 크루즈를 타고 경치를 감상하듯 흐르는 영상들이었다. 흡사 킬리만자로 산 꼭대기에 녹지 않은 만년설을 연상시키는 설산, 습한 지중해의 우거진 올리브나무 그림자들 그리고 보름달이 뜬 가든테라스…. 그 영상 안에는 이야기가 있고, 낭만이 있고 변화하는 날씨를 즐기는 지혜가 있었다. 이미 거의 백 년 전의 날씨를 탓하기 전에 바뀐 날씨를 패션을 통해 즐기려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패션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지만 패션은 늘 즐기는 것임을 잊지 말자. 그래서 봄에 입는 시폰 블라우스가 상큼해 보이고 겨울에 입는 터틀넥 스웨터가 따뜻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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