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되신 것도 대통령님의 운이요, 우리 한국 운이올시다. 엿장수 마음대로 되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유(我有)하니 피유(彼有)하고, 아멸(我滅)하니 피멸(彼滅)이라. ‘나’가 있을 때 저것이 있고, ‘나’가 없으면 저것도 없네. 이것이 불교 소학교 과정입니다. 대통령이시여, 당신은 ‘나’를 아시오? 무엇이오? 말해 보세요. 모르지요? 자기도 모르면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말입니다.”
한국 선불교의 세계화에 기여한 숭산(崇山·1927∼2004) 스님이 1982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미국에서 보낸 편지의 일부다. 스님은 귀국할 때 공항에서 안기부의 남산 청사로 연행돼 몇 시간 동안 고초를 당했다.
얼마나 당당하고 거침이 없나. 생전 스님 모습이 그랬다. 1950년대 불교정화 운동과 종단 행정 때문에 자주 만난 스님은 항상 원만하면서도 적극적이었다. 숭산은 법호이고 행원(行願)이 법명이다.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다니다 1947년 마곡사로 출가했다. 스님은 정혜사에서 용맹정진하며 고봉, 춘성, 일엽, 금봉, 전강 스님 등 당대의 이름난 여러 선지식들을 차례로 만났다. 그러던 차에 선문답 중 말문이 막혀 고심하게 한 고봉 스님을 두 번째 만났다.
“제가 어제 저녁에 삼세제불(三世諸佛)을 다 죽였기 때문에 송장을 치우고 오는 길입니다.”(숭산 스님)
“그걸 어떻게 내가 믿을 수 있느냐? 그놈 고약한 놈인데?”(고봉 스님)
그러면서 스님은 1700공안(公案·화두)을 차례로 물어 나갔다. 숭산 스님이 막힘없이 답하자 고봉 스님은 마침내 “네가 꽃이 피었는데, 내가 왜 네 나비 노릇을 못하겠느냐”며 숭산이라는 법호를 주며 인가했다. 1949년 숭산 스님은 고봉 스님을 법사로 수덕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숭산 스님의 생애는 종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보배처럼 귀하다.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초기에는 교단 정화, 이후에는 해외 포교에 전념했다. 불교신문사 사장을 거쳐 총무원 총무부장, 감찰부장 등을 지내며 교단 발전에 초석을 다졌다.
스님의 해외 포교는 1966년 일본에 홍법원을 개원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1969년 홍콩과 미국, 캐나다,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 해외 각지에 선원을 열었고, 2000년에는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를 개원했다.
40여 년 전 종단이 어수선한 가운데 해외 포교는 스님들의 개인 원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앞서 진출한 티베트와 일본, 미얀마 불교가 성한 데다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도 만만치 않았다. 스님은 나이 마흔이 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올 김용옥은 스님의 영어에 대해 “짧은 영어지만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담아낸다”고 평가한 바 있다.
스님은 해외에서 항상 ‘오직 모를 뿐’이라는 화두로 외국 엘리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부처의 길로 이끌었다. 스님이 뿌린 해외 포교의 씨앗은 30여 개국에 120여 개의 선원으로 늘어났고 제자들은 하버드대 출신으로 유명한 현각 스님, 대봉 스님 등 5만 명에 이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네. 동서남북 지구촌을 돌고 돌아 35년. 올바른 생활을 보여 주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네.”
2001년 해외 포교 35주년을 기념한 숭산 스님의 법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유명한 법어를 빗대어 자신의 삶을 담아낸 스님의 혜안이 번뜩인다.
숭산 스님 생전 미국의 선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관음선종이라는 이름이 붙은 선원들에는 염불과 위파사나, 달라이라마의 옴마니반메훔 등 다양한 수행법이 섞여 있었다.
내가 “조계종 식은 아닌데” 하고 묻자 스님은 “외국인의 경우 기(氣)가 강해 참선만 하라고 할 수 없다. 전통적인 수행법보다는 현지 사정에 맞는 여러 방편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스님의 말년에는 오랜 세월 괴롭혀온 당뇨라는 육체적 고통이 계속됐다. 육체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원력을 포기하지 않던 스님의 마지막 모습들이 생생하다. 스님은 대표적인 선지식이지만, 스님의 삶은 때로 공허해 보이는 선문답(禪問答)에 갇혀 있지 않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