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 일대의 여행지를 추천하는 ‘버킷리스트 투어’. 그 두 번째 순서는 ‘일본의 속살’ 온천료칸이다. 일본엔 5만5000개의 료칸이 있다. 온천료칸도 3000개나 된다. 거기서 하나를 추천하기란 쉽지 않은 일. 그러나 아오모리 현 아오니 온천의 ‘란푸노야도’ 앞에선 주저 없다. 한국인이 꿈꾸는 온천료칸에서의 하룻밤 이미지를 완벽하게 갖춰서다.
고요와 정적만 감도는 눈 덮인 산중, 80여 년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한 고풍스러운 나무집, 다른 혹성에 온 듯 착각을 일으킬 만큼 환상적인 설경, 발그레 호롱불로 밝힌 따끈한 노천탕에서 몸을 담근 채 눈과 달을 보며 즐기는 온천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애니메이션)에나 등장하는 신비의 세계로 빨려들 듯 혼미함마저 드는 색다른 공간이다.
전깃불도 없고 휴대전화도 안 터지는 산중오지 눈 세상의 긴긴 겨울밤을 호롱불 아래서 술과 음식으로 보내는 온천료칸 란푸노야도로 겨울여행을 떠난다.》
아오모리 현 아오니온천의 이 깊은 산중은 겨우내 온통 눈 천지다. 그리고 거기엔 오직 이 료칸 하나뿐인데 호젓한 눈숲 가 로텐부로에서 눈을 맞으며 즐기는 온천욕. 세상에 태어나 한번쯤은 꼭 해볼 만한 지극무한의 호사가 아닐까 싶다.혼슈 북쪽의 땅끝, 아오모리 현. 거기 겨울은 무채색(無彩色)이다. 하염없이 날리는 눈발, 온 세상을 덮는 눈 때문이다. 겨울이면 늘 같다. 하늘은 잿빛, 땅은 눈밭. 변화라면 좀 더 밝거나 좀 더 어둡거나. 이방인 눈에 그건 무채다. 그러나 그건 오만이다. 거기선 ‘색채’여서다. ‘북채(北彩·북방의 색채)’라고 하는.
‘북채기행(北彩紀行).’ 아오모리 현의 여행 주제다. 이 단어를 처음 본 15년 전. 그땐 함의(含意)에 무지했다. 그걸 눈치 챈 건 여러 번 오간 뒤인데 그네들 눈(眼)으로 눈(雪)을 보게 되면서다. 거기서는 눈마다 빛깔이 다르다고 믿는다. 북극권 누나부트 원주민(북미)에게 눈(雪)을 칭하는 단어가 수십 개인 것처럼.
북채기행 중 특별한 곳을 ‘발견’했다. 아오니 온천(구로이시 온천향)의 전통 료칸 ‘란푸노야도’다. ‘특별’한 이유. 아오모리의 ‘북채’에 덧댈 만한 또 다른 ‘빛깔’을 보아서다. 그건 정겹고 따뜻한 호롱불(‘램프’를 일본인은 ‘란푸’로 발음)이다. 료칸은 사방 산에 갇힌 형국. 주변엔 어떤 인공의 시설도 없다. 외부와 통하는 산중도로(8km)가 유일하다. 아오모리는 일본 전국에서 눈 많은 세 곳(홋카이도, 니가타 현) 중 하나. 겨울이면 천지가 눈에 덮인다. 산중의 이 료칸은 더하다. 눈 내린 첫날부터 3월 말까지 단절된다. 외부와 소통할 유일한 수단은 유선전화와 차량(사륜구동 버스, 설상차)뿐. 휴대전화도 먹통이다.
2월 이 란푸노야도를 찾았다. 가는 길도 험했다. 산 하나를 넘어 계곡까지 이어진 8km 산길이 모두 눈길이다. 평소는 료칸의 사륜구동 버스가 시간을 정해두고 다닌다. 그 시간 외엔 바퀴 대신 캐터필러로 움직이는 설상차를 타야 한다. 료칸 버스로 갈아탄 곳은 국도 변의 니지노코 휴게소. 눈길 주파 15분 후. 깊은 계곡 아래 눈에 덮인 목조 료칸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의 칠흑 같은 밤. 거기서 실내를 밝힌 건 멋쩍은 전깃불이 아니었다. 발그레 크림빛깔로 심지를 태우던 남폿불이었다. 그 불 아래선 모든 게 정겨웠다. 객실도, 식당도, 복도도, 현관, 사람까지도. 그리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호롱불은 천장 도처에 걸렸다. 샛별같이 예뻤다. 호롱불은 그 주변만 밝힌다. 그 덕분에 실내는 전체적으로 어둑한 편. 어두우니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름 없으니 느긋해졌다. 느긋해지면 편안해진다. 이런 느림의 미학을 체험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특별한 곳이었다.
한밤중 길을 밝히기 위해 눈구덩이 속에 밝힌 촛불. 왼쪽은 란푸노야도 본관이다.저녁식사 전 건물 밖으로 나가 산책했다. 바로 옆 계곡은 물론이고 주변이 온통 1m 이상 쌓인 눈에 덮여 설국이다. 발 디딜 수 있는 곳이라곤 눈을 치워 바닥을 드러낸 별실통로뿐. 그곳 눈 세상은 절대 침묵의 세상. 어떤 소음도 없이 정적과 고요만이 존재했다. 거기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들은 건 그때다. 눈 쌓이는 소리다. 북채는 그 어둠 속에서도 존재했다. 통로를 밝히느라 그 옆 눈구덩이 안에 켜둔 촛불이다. 눈과 촛불은 잘 어울렸다.
료칸은 통상 오후 2시부터 입실수속을 한다. 그리고 1박엔 2식(저녁과 이튿날 아침식사)이 대개 포함된다. 저녁식사는 오후 6시부터. 온천욕은 그전에 한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온천욕이 식욕을 돋워서다. 음식을 맛있게 즐기려면 식전 온천욕은 필수다. 온천욕엔 순서가 있다. 실내욕장에서 깨끗이 씻고 난 뒤 탕에 들어가 몸을 데운다. 로텐부로(노천탕)는 그 다음. 로텐부로는 작은 정원이다. 그래서 설경도 아름답다. 덥힌 몸을 날리는 눈과 겨울 한기로 식히는 거야말로 온천욕의 백미. 밤에는 휘영청 보름달도, 딸아이 눈을 닮은 눈썹달도 보인다. 거기에 술(일본청주)까지 더하면 풍류는 극에 달한다. 설경을 감상하며 마시는 ‘유키미자케(雪見酒)’, 달을 바라보며 마시는 ‘쓰키미자케(月見酒)’다. 이때 술상은 나무쟁반. 노천탕 물 위에 동동 띄우고 그 물에 몸을 담근 채 눈과 달을 보며 잔을 들어 수작(酬酌)한다.
란푸노야도의 객실은 35개(투숙인원 100명). 온천욕장도 실내와 노천 등 네 개다. 이 중 독립된 별채 형식의 로텐부로 한 개는 혼욕탕이다. 나는 거기서 오후의 한적함을 즐겼다. 오후 3시. 북위 41도 고위도의 아오모리 겨울은 벌써 어스름 땅거미가 진다. 그즈음, 한 직원이 호롱불 네 개를 두고 간다. 두 개는 지붕 아래 어둔 곳 위에, 두 개는 노천의 바닥에. 노천탕 수면에 발간 호롱불이 어린 모습. 그리도 정겨울 수 없었다. 호롱불은 밝은 심지불만 바라봐도 푸근함이 전해진다. 그러면서 잊고 지냈던 아련한 옛 기억이 샴페인잔의 기포처럼 심연에서 끊임없이 솟구친다. 과거를 추억한다는 것. 여유로울 때만 가능한 정신적 사치다. 그날 란푸노야도는 호롱불과 온천욕으로 내게 그걸 선물했다.
료칸에서 드는 저녁식사. 1박 2일 투숙 중에 가장 기대되는 이벤트다. 오카미(여장·료칸 총지배인으로 여자)도 여기에 온 신경을 쓴다. 미인의 얼굴처럼 료칸 평가의 기준이어서다. 나는 다다미방으로 안내됐다. 방 안 역시 호롱불 네 개로 밝혀졌다. 조금 어둡기는 하나 식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4개의 개별식탁은 방 한가운데 이로리(바닥을 파 불을 지피고 천장에 매단 줄로 주전자를 걸어두는 사각형의 화로) 주변에 차려졌다. 식사는 가이세키(會席·기본 찬을 올린 각자 상에 여러 요리를 차례로 올리는 연회의 식사자리) 요리. 산중의 료칸에서는 다양한 산채와 계곡에서 잡은 곤들매기 화로구이가 주메뉴였다. 예서 술이 빠질 수 없다. 가이세키 요리라면 사케가 좋다. 지자케(地酒·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케)는 더더욱 센스 있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최고 요리란 ‘그 지역에서 생산된 제철 신선한 재료로 만든 것’인데 그 맛 역시 그곳 술과 잘 어울리니까. 남폿불 아래 쉼 없이 오가는 사케잔과 함께 그날 란푸노야도의 하얀 밤은 깊어만 갔다. 설국의 정적도 더불어. ▼ 아오모리의 겨울… 눈(雪)이 즐겁다, 입이 즐겁다 ▼
아오모리 현의 설경 감상에 그만인 쓰가루 철도의 ‘스토브열차’ 실내. 1940년대 구식 열차로 가운데 석탄난로로 난방을 하는데 지금은 관광용으로 운행 하고 있다.아오모리 현에서는 한겨울 즐길거리도 많다. 그중 백미는 눈과 음식이다.
눈 즐기기▶▶▶ 핫코다 산 크고 작은 산 11개가 이룬 거대한 설산의 주봉(오다케)을 로프웨이로 오르면 주효(樹氷)가 기다리고 있다. 이곳 나무는 덕지덕지 쌓인 눈으로 괴물 모습의 눈덩이로 변하는데 그게 주효다. 산정에서는 주효 숲을 걷는다. 스키도 가능하나 길을 잃을 우려가 있으니 현지 가이드 동반은 필수. www.hakkoda-ropeway.jp
핫코다 워크 눈 때문에 겨우내 폐쇄된 국도 103호선의 8.1km 설벽(높이 9m) 구간 걷기. 3월 말 재개통 직전 사흘간 진행된다.
눈보라 체험 지면의 눈이 강풍을 타고 하늘로 치솟는 ‘위로 내리는 눈’ 체험. 쓰가루 철도의 고쇼가와라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쓰가루 스토브 열차 석탄난로로 난방을 하던 1940년대 구식 꼬마열차(객차 두 칸). 쓰가루 철도 폐선 구간(20.7km·45분)의 설원 운행(하루 2회 왕복). 난롯불 즉석 오징어구이와 지자케 판매. tsutetsu.web.infoseek.co.jp
도와다코 후유모노가타리 ‘도와다 호수의 겨울 이야기.’ 2월 호반 눈밭의 눈조각&조명축제(오후 9시까지). www.towadako.or.jp, www.lakeship-towada.co.jp
음식 즐기기▶▶▶ 삼면이 바다인 아오모리는 풍부한 해산물로 생선 요리가 발달. 호다테(가리비)는 사과와 더불어 아오모리 대표 먹거리. ‘후지’사과에 대한 오해 하나. 일본 최고봉 화산 후지(富士)가 아니다. 아오모리 현 내 사과 산지 ‘후지사키(藤崎)’에서 유래했다.
하치노헤 선술집 골목 동남부 하치노헤 시내에 옛 모습 간직한 주점 골목. 하치노헤는 태평양 해안의 풍치 철도인 JR하치노센의 주요 역. 골목은 역에서 도보로 15분 거리. www.city.hachinohe.aomori.jp/kanko
사케▶▶▶ 아오모리 사케는 달지 않고 드라이한 가라쿠치 맛이 특징. 쓰가루 지역 히로사키 시에 위치한 ‘로카(六花·www.joppari.com)’가 대표적인 사카쿠라(酒藏·양조장)다. 로카의 대표 브랜드는 달마상이 그려진 ‘좃파리’(‘고집불통’을 뜻하는 쓰가루 사투리). 국내에도 수입되는데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린다.
글·사진 =란푸노야도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 Travel Info
[위치]아오모리 현 혼슈 최북단(북위 41도)란푸노야도 현 중앙의 구로이시 북쪽 [정보] 아오모리 현 aptil.net.pref.aomori.jp/, www.beautifuljapan.or.kr, www.welcometojapan.or.kr [항공] 인천~아오모리 대한항공 직항(주 3회·수금일 오전 10시 반 인천 출발). 2시간 15분 소요 [기후] 냉량형. 연평균 10.1도, 한겨울 최저 영하 7.8도. 겨우내 눈 [료칸] 란푸노야도(www.yo.rim.or.jp/~aoni). 1929년 개업. 구로이시 온천향 내 아오니 온천. 수질은 단순천, 수온은 43~46도. 10년 전 전기가 들어왔으나 주방에만 사용. 숙식비 1인당 1만650엔(1박 2식). 료칸 버스 하루 3회 운행. 하루 방문(점심식사와 온천욕)도 가능. 적설량 3m. 0172-54-8588 [교통] 공항~란푸노야도 택시로 한 시간(5000엔) [할인] 기타토호쿠 웰컴카드. 각 현의 지정 업소만 1년간 할인. 외국인 전용으로 여권 제시 후 사용. www.northern-tohoku.gr.jp/welcome/index.html
■ 100자평
겨울 아오모리 여행 주제는 ‘눈, 온천, 음식’이다. 2월 도와다 호반에서 펼칠 눈과 조명의 축제 ‘후유모노가타리’, 핫코다 산 스키·설피 트레킹, 하치노헤 선술집 골목은 특히 강추.
삼성카드는 색다른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트래블 스페셜 리스트와 일대일 상담을 통한 ‘맞춤여행’을 제공한다. 이들은 경력 10년 이상의 전문가로 라이프 스타일과 예산, 여행 목적과 테마에 맞춰 다양한 여행을 제안한다. 버킷리스트 투어는 물론이고 오지(북극, 남극)와 테마(자동차, 미식, 트레킹, 출사) 여행도 맞춤여행으로 만들어 준다. 또 24시간 헬프라인(도움전화)을 가동해 긴급 상황(카드 분실, 병원 치료, 항공 수하물 미도착)과 현지 예약을 전화(한국어)로 도와준다. 삼성카드 포인트와 마일리지도 적립 가능. 1688-8500, 8200, travel.samsungcar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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