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말한다. 역사란 기억의 구성물일진대 그 기억이라는 것이 어차피 주관적 착오와 편견의 산물이므로 객관적 역사란 존재할 수 없다고. 정신분석가들은 말한다. 어차피 인간이란 환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당신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 그 자체가 환상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가짜 기억과 가짜 현실로 구성된 ‘매트릭스’ 속 환영에 불과한 것일까.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연극 ‘굴레방다리의 소극’(임도완 각색·연출)은 이 같은 현대적 회의론에 옹골차게 답한다. 진실을 은폐하고 억압하려는 욕망 스스로가 자신을 배반하고 진실을 폭로하기 마련이라고.
무대는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허름한 지하 셋방. 거실을 중심으로 안방과 부엌으로 구성된 이 공간에 홀아비 냄새 물씬한 세 사내가 산다. 17년 전 중국 옌볜에서 건너온 아버지 김대식(권재원)과 옌볜에 어머니 홀로 남겨두고 아비를 따라 한국으로 건너온 두 아들 한철(홍승균) 두철(이중현)이다.
문제는 이들 중 정상으로 보이는 사내가 한 명도 없다는 것. 머리를 빡빡 민 아비 대식은 척 보기에도 아드레날린 넘치는 폭군이다. 맏이 한철은 스타킹에 치마를 두른 복장도착자처럼 보이고 막내 두철은 가운데 머리를 민 ‘영구’를 닮았다.
기막힌 점은 서로 말도 안 섞을 것 같은 이들 셋이서 연극 공연을 펼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더 기막힌 것은 그 연극의 내용이다.
유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는가 하면 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형제가 서로 속고 속이다 못해 죽고 죽이는 상황까지 펼쳐진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말에 깔려 어머니가 죽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땜장이가 뇌수술 전문의 행세를 해도 다 용서된다.
코믹한 캐릭터들이 말도 안 되는 연극을 끌고 가는 중간 중간 또 다른 코미디가 펼쳐진다. 아버지는 ‘사실성’을 누누이 강조하며 대사 한 줄, 동선 하나만 원작과 달라도 펄펄 날뛰고, 두 아들은 약간의 실수에도 벌벌 떤다. 그렇게 극중극이 잠시 중단될 때 부자간의 대화를 통해 관객은 폭소 넘치는 연극과는 전혀 다른 섬뜩한 진실을 만난다.
극중극은 삼부자가 옌볜에 살던 당시 ‘살인의 추억’을 재구성한 것이다. 대식은 살인사건에 연루돼 어머니가 남긴 유산을 들고 동생이 살던 서울 지하 셋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혹시나 경찰에 잡힐까 두려워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17년을 버텨왔다. 그로도 부족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연극을 만들어 당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두 아들과 매일같이 똑같은 연극을 펼쳐온 것이다.
그 극중극은 일종의 성스러운 제의(祭儀)다. 아비의 죄의식을 씻어주면서 뿌리 뽑힌 삶을 살아야 하는 그들의 외롭고 비참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제의. 문제는 그를 위한 제물로 그들의 삶 자체를 통째로 바쳐야 한다는 점이다.
삼부자와 현실의 접점은 연극에 필요한 소품(일용할 양식이기도 하다)을 구입하기 위해 장을 보러 다니는 막내가 유일하다. 그 막내의 실수로 마트 종업원인 베트남 처녀(강민정)가 이들의 은거지에 들이닥치면서 그 매트릭스에 균열이 생긴다. 놀랍게도 그 균열은 그들의 막돼먹은 ‘억지 연극’ 속 패륜적 상황과 조응하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진짜 묘미는 ‘조작된 연극’과 ‘있는 그대로 사실’ 사이의 간극을 체현하는 배우들의 몸의 연기다. 흔들리는 눈빛과 떨리는 손끝으로 연기하는 두 아들의 신경증적 연기도 뛰어나지만 ‘전원일기’ 속 최불암을 자처하면서 ‘넘버3’ 속 송강호에 더 가까운 아비를 그려낸 권재원 씨의 분열증적 연기는 압권이다.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엔다 월시가 쓴 원작(‘월워스의 소극’)의 맛을 살리기 위해 옌볜 조선족의 말투와 유행가까지 끌어들인 섬세함도 돋보인다. 하지만 영국에서 차별 받는 아일랜드인 스스로 병적인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그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에서 차별받는 조선족을 동원하는 것 사이에는 해소할 수 없는 불편함도 존재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008년 초연됐던 작품의 남자 배역을 모두 바꿔 새롭게 공연 중이다. 31일까지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만∼2만 5000원. 02-764-7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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