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리트, 차이나타운, 유니언스퀘어 등 맨해튼의 주요 지역명을 테마로 한 향수를 선보이는 '본드 NO.9' 매장에 전시된 향수병들. 선택의 폭을 넓혀 맞춤식 향수를 가진 듯한 느낌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12월의 뉴욕은 물질문명의 성지(聖地) 같았다. 올가을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성난 군중의 목소리는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열리는 세일 시즌, ‘블랙프라이데이’에 자리를 양보한 듯했다. 맨해튼 5번가에 즐비한 고급 백화점의 쇼윈도는 예술작품인지 판매용 패션 아이템인지 알쏭달쏭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조형물로 일찌감치 크리스마스맞이에 나섰다.
하지만 뉴욕의 뷰티 트렌드는 이 모든 대중적, 과시적 풍경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었다. 개인적 필요에 맞춘 사적인 서비스, 즉시 효과를 보기보다 피부 건강을 중시하는 트렌드는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뉴요커들을 맞았다.
고객이 ‘원하시는’ 대로…
소호에 문을 연 향수 매장 ‘아틀리에 콜론’은 향수병을 보호하는 가죽 액세서리에 고객의 이름을 새겨 주는 서비스로 각광받고 있다.뉴욕 맨해튼 59번가에 위치한 블루밍데일 백화점 내 ‘크리니크’ 매장은 ‘살리(SAYLI)’ 스토어로 불린다. ‘SAYLI’는 ‘당신이 원하는 서비스(Service As You Like It)’란 문구의 첫 자를 딴 것. 이달 2일 방문한 블루밍데일 매장에는 이에 맞춰 △뷰티 컨설턴트와의 일대일 상담 △셀프 서비스 △아이패드를 활용한 진단 △익스프레스 서비스 등을 고객의 취향, 시간 여유 등에 맞춰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섹션별로 마련됐다.
성탄 특수를 앞두고 백화점을 찾은 고객들로 붐볐던 이날, 한 50대 중년 여성은 판매 사원과 함께 열심히 확대경을 들여다보며 15분가량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반면 헤드폰을 낀 30대 여성은 입구에 비치된 쇼핑 바구니를 들고 마스카라와 립스틱 제품들이 한눈에 들어오게 전시된 ‘마스카라 앤드 립 바’로 향했다. 계산까지 약 3분이 걸리는 이 동선도 길게 느껴진다고 느끼는 고객들은 매장 입구에 위치한 익스프레스 코너에서 원하는 제품을 곧바로 구입해 갔다.
개성 있는 작은 숍들이 즐비한 소호 거리에서는 향수나 보디크림 등 뷰티 제품 자체를 개인의 취향에 맞춰 제조하거나, 패키지에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는 맞춤식 서비스를 도입하는 매장이 하나 둘 늘고 있었다.
올 8월 말 문을 연 프랑스 향수 매장
‘아틀리에 콜론’은 향수병 보호용 가죽에 이름을 새겨 넣는 서비스를 해 준다.
미국 뉴욕 맨해튼 59번가 블루밍데일 백화점 내 크리니크 매장에 도입된 ‘살리’ 콘셉트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쇼핑 동선을 정하는 일종의 ‘맞춤식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다. 한 여성이 셀프 쇼핑을 선호하는 고객을 위해 마련한 ‘마스카라 앤드 립 바’에서 립스틱을 고르고 있다.
터프한 외모와 상냥한 말투가 묘한 조화를 이루는 매장 직원은 “향수가 개인적인 소장품으로 여겨지기 쉬운 아이템이다 보니 패키지에 이름을 새긴 제품은 선물용으로 많이 팔린다”고 말했다. 매장 분위기와 달리 가격은 친절하지 않았다. 향수 200mL당 값은 145달러(약 17만 원)에서 185달러(약 21만 원)이고 이름을 새긴 가죽 장식을 덧댈 경우 50달러(약 5만8000원)가 추가됐다.
‘아틀리에 콜론’으로부터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 자리 잡은 ‘르 라보’는 아예 ‘맞춤 제조’를 콘셉트로 삼고 있다. 친환경적 패키지에 천연 허브와 오가닉 소재만을 활용한 향수, 보디 제품 등을 판매하는 이곳은 브로슈어와 패키지 곳곳에 ‘대량 생산, 대중적 채널을 통해 판매하는 향수는 개성이 없다’며 ‘틈새 브랜드’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향수 관련 제품을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판매하기 위해 고객이 제품을 고르면 즉석에서 ‘제조’하는 방식이 돋보였다. 이곳에서 판매하는 오렌지꽃 향에 반해 보디크림을 구입하자 직원은 먼저 패키지 위에 붙일 스티커에 누구 이름을 적을 것인지 물었다. 제품이 포장된 박스 안에는 ‘감사합니다, 르 라보 팀으로부터(Merci, from Le labo)’라고 쓴 친필 감사 명함도 들어있었다. 160mL 남짓한 보디크림 하나에 78달러(약 9만 원)나 지출하고 말았지만 덕분에 딸 이름이 적힌 ‘나만의 제품’을 갖게 됐다.
프라이빗하게
소호의 ‘아모레퍼시픽 뷰티 갤러리&스파’는 ‘섬김 서비스’를 내세워 깐깐한 뉴요커들에게
합격점을 받고 있다(위). ‘키엘’이 최근 문을 연 ‘스파 1851’ 내부의 이발소(중간)와 ‘키엘’오리지널스토어의 한 벽면을 가득 채운 고객 및 직원들의 아기 사진.‘스파 왕국’이라 불리는 뉴욕에서도 스파 트렌드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올 7월 맨해튼의 대표 부촌인 어퍼이스트사이드에 문을 연 ‘스파 1851’은 화장품 브랜드 ‘키엘’의 첫 스파다. 1층은 할리데이비슨의 모터사이클과 해골 모양 조형물, ‘미스터 본스(Mr. bones)’가 인테리어 소품으로 쓰인 화장품 매장이고 2층은 스파로 꾸며졌다. 스파 공간 제일 안쪽에 남성들이 이발, 면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 이발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독특해 보였다. 예스러운 빈티지 느낌으로 꾸민 이발용 의자며 인테리어 소품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자동차로 10여 분간 이동해 도착한 ‘키엘’의 오리지널스토어도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오리지널스토어는 이 브랜드가 160년 전 설립될 때부터 한자리를 지켜온 매장이다. 베이비 전용 제품을 파는 코너 앞에는 이 매장에서 일한 직원과 고객들의 아기 사진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애견용 제품 코너 앞에는 아기 대신 강아지 사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직원 한 명은 “날씨도 추운데 핫초콜릿 한 잔 드시라”며 정겨운 얼굴로 고객들에게 음료를 건넸다.
안내를 맡은 키엘의 캐미 카넬라 교육담당 부사장은 “고객 얼굴을 기억해주고, 원하는 제품을 찾아주는 아날로그적인 ‘프라이빗 서비스’가 기술이 앞서는 사회에도 여전히 트렌드”라고 설명했다.
2003년 아모레퍼시픽이 문을 연 소호의 ‘아모레퍼시픽 뷰티 갤러리&스파’ 역시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신경 쓰는 서비스로 까다로운 뉴요커들에게 각광받는 곳 중 하나다. 서비스가 남다르다는 입소문으로 지난해 미국 ‘러키 매거진’이 선정한 뉴욕 최고의 페이셜 스파로 꼽히기도 했다. 노래준 매니저는 “현지 직원들에게 동양식 ‘섬김’ 문화를 전수하려 애쓴 것이 고객 만족도 향상에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오가닉하게
‘아모레퍼시픽 뷰티 갤러리&스파’는 대나무 수액을 주 성분으로 하는 ‘아시아의 식물성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내세우면서 깐깐한 뉴요커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노 매니저는 전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백, 주름 개선 등 즉각적인 효과를 원하던 스파 고객들이 오가닉, 자연주의 열풍에 힘입어 피부의 내적 아름다움을 가꾸는 분위기로 옮겨갔다”고 전했다.
첼시에 위치한 신예 브랜드 ‘말린+고에츠’ 역시 오가닉 콘셉트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 브랜드는 바니스뉴욕, 키엘 등에서 경력을 쌓은 매슈 말린과 디자인업체 ‘비트라’ 등에서 일한 앤드루 고에츠가 만나 설립했다. 매장 직원 라이랜드 힐버트 씨는 “남성용과 여성용 화장품을 구분짓는 것 자체가 상술이라는 설립자들의 철학에 따라 오가닉 성분의 유니섹스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밖에도 유명 피부과 의사가 만든 화장품 및 피부건강식품 브랜드 ‘페리콘 MD’ 매장과 맨해튼의 주요 지역 이름을 본뜬 향수를 판매하는 ‘본드 NO. 9’ 등의 매장을 부지런히 오가며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뉴요커들이 얼마나 따뜻하고, 개인적이며, 나를 위해 주는 브랜드와 제품을 희구하고 있는지….
경기 침체 여파로 여행 책에 나오는 대표 매장들마저 간판을 내리고 없는 우울한 시대에 뉴요커들이 찾는 것은 어쩌면 화장품이 아니라 위안 한 조각이 아닐까.
뉴욕= 글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뉴욕= 사진 김성욱 포토그래퍼 sungwook@sungwook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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