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는 오늘도 한복 꿈을 꾼다. 한복으로 감동을 주는 꿈을 꾼다. 그의 꿈은 모두 한복에서 나온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매장이자 집이기도 한 그곳에서 그가 햇볕이 따스한 평상에 앉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분홍색인데 그냥 분홍이 아니었다. 낡아 조금 바랜 치마에 감도는, 이상하면서도 은은한 분홍빛. 녹두색의 오묘한 색감을 드러내는 저고리는 먹자주색으로 끝동을 대고 금박을 했다. 전모(氈帽·조선시대 여성들이 나들이 때 쓰던, 자루 없는 우산 모양 모자)를 쓴 마네킹은 영락없는 옛 기녀(妓女)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이영희(75)는 깜짝 놀랐다. ‘어마, 우리 어머니가 명주홍두깨 하실 때 봤던 색하고 너무 똑같네.’ 어렸을 적 어머니가 집안 마당에 자라던 포도나무에서 딴 포도 껍질이며, 뜰에 핀 꽃들을 찧고 빻고 주무르고 끓여서 마술처럼 만들어내던 색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복집을 연 지 4, 5년이 되도록 풀리지 않던 색에 대한 갈증이 순식간에 해소됐다. 거짓말처럼 눈물이 흘렀다. 30년 전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1층이었다. 》 ○ 기녀복
“당신이 만든 거 누가 사겠노?” 남편은 기가 찼다. 명주솜, 이불 판다고 할 때만 해도 별말 없던 그였다. 대학 보내주겠다는 말에 ‘속아’ 여고를 갓 졸업하고 결혼한 지 15년여. 남편은 ‘삼남매 키우며 답답할 만도 했겠다’ 하는 생각이었을 게다. 그런데 한복이라니…. 1976년, 이영희 나이 마흔이었다. “철없이 열었어요. 제가 꼼꼼하게 살피거나 하지도 않았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떻게 했나 싶죠.”
그 3, 4년 전이었다. 대구에서 명주솜 공장을 하던 사촌언니에게서 무턱대고 이불솜 100장을 받아 왔다. 고교 동창생을 비롯해 지인들에게 소개하니 금세 팔렸다. 그러곤 누군가에게서 명주솜이불을 선물받았다. 빨간 꽃분홍에 초록색 깃이 달린 이불이었는데 덮으니 포근하고 따사로웠다. 그런데 색이 너무 강렬해서 밤에 보니 마음이 평온하지 않았다. 사촌언니가 같이 다루던 뉴똥(명주실로 짠 옷감의 일종)으로 홑청을 해서 이불을 만들어 팔면 어떨까 했다. 그래서 은은한 색으로 뉴똥을 보내 달라고 사촌언니에게 주문해 이불을 지었다. 정식 이불집도 아닌, 집에서 만든 이불이 한 달에 1000채가 나갔다. 하루는 사촌언니가 전화를 했다. “니 이거 내버리는 거 아이가? 도둑맞은 거 아이가?”
이불을 신나게 파는 와중에 홑청을 만들고 남은 뉴똥이 아까워 한복을 지어 입었다. 그랬더니 이불도 이불이지만 그 한복을 사자는 고객이 줄을 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한복이었다. 1970년대 당시 한복집이라면 보통 집에서 바느질로 한복을 짓던 사람들이 가게를 열어 조금씩 커지는 식이었다. 그도 어머니가 아버지며, 당신의 시어머니 한복을 짓는 것을 곁에서 보고 배워 한복을 만들 줄은 알았다. 하지만 자신의 바느질 솜씨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솜씨 좋은 사람을 고용했다. 그 대신 디자인에 주력했다.
새롭고 독창적인 한복을 어떻게 하면 지을 수 있을까 몰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하는 박물관대학을 수강하고, 전통 복식(服飾)에 관한 책도 찾아 읽었다. 그런데 문제는 색이었다. 동대문시장이나 유명하다는 주단(紬緞)집을 찾아가 봤지만 옷감은 좋은데 색이 아니었다. 강렬한 원색이 대부분으로 색이 튀고 귀티가 나지 않았다. “정말 너무 마땅한 게 없더라고요. 누구를 시켜서 알아볼 수도 없고. 답답해서 그땐 한복을 안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의 한복집 ‘이영희 한국의상’은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지만 가슴은 허했다. 그때 그를 구원한 것이 석주선박물관의 기녀복(妓女服)이었다. 어머니가 하던 자연염색이 그의 머릿속에 다시 들어왔다.
○ 트위커
석주선박물관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옛 단국대 캠퍼스에 있었다. 그날, 전시된 조선시대의 각종 옷을 다 돌아본 그는 무슨 용기에선지 1층 사무실 문을 열었다. 한복연구의 대가 석주선(石宙善·1911∼1996) 선생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한복집은 열었는데 한복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한복을 연구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석 선생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작고할 때까지 그에게 그지없는 스승이 돼 주었다. “그때 제가 한복을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자신감이 생긴 거예요. 큰 꿈을 안게 된 거죠.”
그날 이후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몇 개월 뒤 한복 전문가들의 모임인 한국의상협회가 설립 기념으로 연 의상발표회에 다른 한복연구가 9명과 함께 초청을 받았다. 사실상 한복의 ‘철부지’인 그가 한복만 10∼20년 지은 사람들과 한자리에 섰다. 정말 열심히 한복 10벌을 지어 무대에 올렸다. 큰 창피를 당하지는 않을까 고민도 했지만 주위의 평가는 기대 이상이었다. 뒤이어 KBS 방송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6개월 뒤 서울 신라호텔에서 첫 한복 패션쇼를 열었다. 1000명이 들어가는 공간에 KBS관현악단을 불러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가수 송창식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큰 성공이었다. 한복이 완전히 자신의 생명이라는 걸 느꼈다.
이후 그는 한복의 옛 모습을 배울 수 있기만 하다면 시골 어디든 마다 않고 달려갔다. 얼마를 주든, 빚을 지고서라도 옛 우리 옷을 사 모았다. 옛것에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찾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 그를 해외에서도 찾았다. 프랑스 파리 프레타 포르테에 한복을 처음 올려 격찬을 들었던 것도 그였고, 미국 뉴욕에 ‘한복박물관’을 연 것도,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 한국관에 한복을 영구 전시한 것도 그였다.
베스트셀러 ‘블링크’ ‘아웃라이어’ 등으로 유명한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지난달 미국 주간지 ‘뉴요커’에 실은 글에서 트위커(tweaker)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트위커는 ‘발명가의 발명을 개선하고 발전시켜 완벽하게 만드는 사람’이란 뜻이다.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를 만든 스티브 잡스의 진정한 천재성은 그가 발명가라기보다는 트위커라는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영희는 한복의 트위커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때로는 파격으로, 때로는 과감함으로 한복을 새롭게 만들어 세계에 선보였다. 1993년 그의 모델들이 저고리를 벗어 버리고 말기로 가슴을 조인 한복 치마만 입은 채 맨발로 파리의 런웨이를 활보했을 때 파리 언론은 ‘바람의 옷’이라고 찬사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속담이 아닌 현실에서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그는 무대에 오른 자신의 옷을 보고 다시 한복을 재해석한다고 했다. “창작이라는 건 없어요. 이미 있는 물체를 개발하고 또 바꾸는 거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내가 뭘 만들었다는 건 있을 수 없잖아요. 그걸 느꼈어요. 한복을 하면서.”
○ 한복은 나의 꿈
1980년대 초반, 그는 당사주(唐四柱·그림으로 보는 사주풀이)를 봤다. 사주쟁이가 펴놓은, 그의 사주가 나타난 책의 한쪽에는 꽃이 만발한 나무 밑에서 놀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또 다른 쪽에는 말을 타고 계속 앞으로 달리는 그림이 있었다. 그의 운명(運命)도 지금까지 비슷하게 달려왔다. 자신감이 넘치기도 한다. “한복에서 1등과 2등의 차이가 너무 나니까 주변 질시의 목소리는 듣지를 않았어요.”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한때 ‘이영희는 쇼 중독자’라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끊임없이 쇼에 한복을 올린다. “쇼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은 셈이에요. 무대에서 감상을 해보지 않으면 내 옷이 맞는지, 아닌지, 다음에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라요. 그게 공부예요.”
그에게 한복은 꿈이다. 한복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한복을 짓고, 다시 새로운 디자인을 남에게 보여주면서 더 새로운 옷을 보여주겠다는 꿈을 계속 만들어 간다. 내년 7월에는 한산모시로 지은 한복을 들고 세계 최고의 패션쇼 무대인 ‘파리 오트 쿠튀르’에 선다. 꿈꾸는 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