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서울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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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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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가 피난가던 문… 잘린 성곽은 서글픔 더해

‘광명의 문’. 잘 알려지지 않은 한양의 옛 성문인 ‘광희문(光熙門)’의 뜻이다. 길 한가운데를 막고 출입하는 모든 백성들을 지켜봐왔던 성문은 도로의 발달과 함께 한낱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다른 성문들을 생각하면 길 밖으로 옮겨져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있는 광희문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까. 광희문의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를 살펴보자. 동대문에서부터 성곽이 있던 길을 따라 천천히 광희문으로 향한다.

○ 날개 잘린 새

동대문운동장이 사라진 드넓은 터에선 디자인플라자 공사가 한창이다. 운동장을 철거하면서 발굴해낸 수문(水門)의 규모에 새삼 놀란다. 이토록 큰 유적들이 땅 속에 고스란히 묻혀 있었다니. 서울은 그 자체가 역사유적지라는 말이 다시금 생각난다. 어느덧 횡단보도 건너편의 광희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성문은 1975년 도성 복원 과정에서 원래 자리에서 남쪽으로 15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한쪽 성곽이 잘린 모습은 다른 성문들에서도 여러 번 봐왔지만, 볼 때마다 ‘날개 잘린 새’처럼 가엾어 보이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신호가 바뀌고 시원스레 뚫린 7차로 도로를 건넌다. 길을 건너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이 장소에 어떤 아픔이 담겨있는지 조금이라도 알고 있을까.

○ 시신이 나가던 성문

세간에서는 1396년(태조 5년)에 태어난 이 문을 수구문(水口門)이라 불렀다.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가 광희문 근처(지금의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성곽과 만나는 곳에 수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희문은 위치상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에 있긴 하지만 남소문은 아니었다. 남소문은 1457년(세조 3년) 교통의 편의를 위해 남산 위에 추가로 만들어졌다. 남소문은 처음부터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음양설에서 손방(巽方:동남쪽)은 왕가의 ‘황천문(皇天門)’이라며 불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때마침 세조의 세자였던 의경세자가 왕위를 물려받기도 전에 병사하면서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굳게 닫혔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이 문이 어디에 있었고, 언제 없어졌는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동남쪽에 있었던 탓일까. 광희문은 상여가 나가는 문이라고 해 ‘주검 시(屍)’자를 넣어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렀다.

조선 시대에는 도성 안에 무덤을 조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성 안에서 생을 마감한 이는 무조건 성을 나가야 했다. 이때 시신이 나갈 수 있는 문은 소의문(서소문)과 광희문(수구문)뿐이었다. 특히 광희문 밖 일대에는 공동묘지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당들이 많이 살아 ‘신당(神堂)’이라 부르던 것을 구한말 신당(新堂)이라 고쳤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신당동이다.

○ 가혹한 역사의 목격자

광희문에는 이외에도 서글픈 역사가 많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가던 길에 왕의 격식을 차릴 틈이 없어 황급히 이 작은 문으로 빠져나갔다. 1880년대 후반 서울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이 성문 밖에 전염된 사람들이 산 채로 버려져 마치 생지옥을 연상케 했다. 1907년에는 일제가 강제로 군대를 해산하면서 이에 불복한 한국군의 저항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제는 남대문 인근의 큰 접전에서 사망한 한국군 시신 120여 구를 모두 광희문 밖에 늘어놓고는 가족들이 찾아가 묻으라고 했다. 이에 광희문 앞에선 며칠간 통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광희문의 역사에는 이렇듯 생각만 해도 오싹한 장면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오죽하면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양 가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오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세상 어떤 병일지라도 시구문이 겪었던 가혹한 고난에는 이기지 못할 것이란 미신이 시구문 돌가루란 만병통치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광희문 앞에 섰다. 석축엔 오랜 세월의 흔적에 더해 많은 이들이 긁어내 생긴 듯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마저도 역사라고 품고 있는 광희문의 묵직한 고독이 느껴졌다. 다가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참았던 울음을 툭하고 터뜨려 버릴 것만 같은 침묵. 종종 무덤에 놓여 있는 비석이나 석물들을 보면 죽음을 매개로 돌과 인간이 밀접한 유대감을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느낌이랄까. 광희문에선 그런 돌의 깊이가 느껴졌다. 성문의 돌은 편안한 모습으로 내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은 긴 이야기를.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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