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개와 고양이 등을 반려동물로 키우면서 ‘내 아이’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 인간은 왜 유전적으로 거리가 먼 이들에게서 유대감을 느끼고 기쁨을 얻는가. (ID: hera****) 》
“강아지가 다쳐 병원에 갔는데 치료비가 엄청나서 고민했어. 그런데 눈물이 그렁그렁한 딸을 보고는 얼른 카드로 긁었지.” 동료가 하소연을 한다. 강아지가 자신의 도덕성을 시험했다나? 치료비가 월급의 반이었다니 그럴 만도 하다. 애완동물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안쓰러워 멀리 여행도 못 가는 사람이 적지 않다.
20년 전쯤이라면 이는 분명 유난 떠는 일이었다. 밥 굶는 사람도 흔한데 웬 사치냐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있다. 호칭부터 달라졌다. 장난감 같다는 뜻의 ‘애완동물’보다는 서로 돕고 산다는 뜻의 ‘반려동물’이 표준어로 굳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약 500만 가구가 반려동물을 기르고 있고, 관련 산업은 연간 1조 원 규모로 성장했다. 반려동물은 또 하나의 가족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동물 권리 운동가들이 동물의 지위에 대한 최근의 인식 변화에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동물의 권리가 인간의 것과 똑같을 순 없더라도 동물 개개의 삶이 무시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가령 신제품 개발을 이유로 토끼의 눈에 마스카라를 수천 번 바르는 회사들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인다든지, 열악하고 잔인한 사육과 도축 현장을 고발해 육식 문화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이런 운동의 배후에는 동물에 대한 과학적 연구들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진화론은 동물에 대한 연대감과 정서적 의무감의 원천이다. 다윈은 동물과 인간이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사촌들임을 입증했다. 진화의 나무에서 인간이나 고양이는 모두 잔가지에 불과하다. 이에 사회생물학자 윌슨은 우리가 다른 생물에 대한 우애와 자연에 대한 깊은 친화력, 즉 ‘바이오필리아’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타성에 대한 진화론적 연구는 남을 돕는 행동이 혈연을 넘어 비혈연 집단으로까지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도덕본능이 어떻게 동물의 세계로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가 장기적으로는 본인에게도 이득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그런 행동이 선택될 수 있고, 자연은 그런 사람에게 ‘기쁨’이라는 정서적 보상을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진화한 보상 메커니즘이 동물들을 대할 때에도 작동하기 때문에 그들의 권리까지 논의하도록 우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 도덕본능의 진화를 뒷받침하는 신경학적 근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예컨대 남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행동을 본인이 했을 때 일어나는 뇌 작용과 똑같은 일이 뇌 속에서 일어난다. 연구자들은 여기에 ‘거울신경세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스포츠나 공연을 보며 열광하는 것은 모두 이 공감세포 덕분이다. 이 세포가 가장 발달한 종이 인간이란다. 우리는 다른 존재(동물)의 기쁨과 고통까지도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종으로 진화했다. 그래서 성공했다. 이제 상생적 성공을 위해 더 강력한 ‘호모 엠파티쿠스’(공감하는 종)로 업그레이드될 때가 아닐까?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진화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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