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크리스마스 선물, 아이에게 기쁨? 아픔?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4일 03시 00분


산타를 믿는 척… 성에 안차도 좋은 척…■ 성탄절 동심 스트레스, 우리가 몰랐던 진실

#1. 유치원

“유치원에서 전달할 크리스마스 선물은 가로 세로 높이가 40cm를 넘지 않도록 해주세요.”

서울 강남구의 A유치원은 최근 학부모들에게 이런 공지사항을 전했다. 7세와 5세 두 아이의 엄마 이모 씨는 고민에 빠졌다. 자녀가 원하는 ‘블록 쌓기’ 세트는 부피가 꽤 크기 때문이다. 유치원 방침을 따르자니 아이가 실망할 것 같고, 그렇다고 내 아이만 생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선물 고르기가 만만치 않다.

송파구 B유치원은 조금 이른 21일 부모가 맡겨둔 크리스마스 선물을 아이들에게 전달했다. 이곳도 선물 크기에 대해서만큼은 학부모들과 ‘A4용지 정도’로 사전에 합의했다. 유치원들이 이처럼 선물 크기에 민감한 이유는 간단하다. 친구보다 크기가 작은 선물을 받으면 내용물과 상관없이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2. 정신과병원

서울 서초구 방배동 연세신경정신과병원에서 상담을 받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직후 상태가 더 심해지는 경우가 꽤 있다. 갑자기 거친 행동을 보이고, 부모의 지시에 반응을 하지 않거나, 안 하던 반항을 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행동이 나타난 원인은 뭘까.

아이는 우울하다. 아이가 책을 읽을 때마다 환하게 웃던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덜컥 책을 사왔다. “올해는 네가 착하게 굴어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네”라
는 유치한 말과 함께. 자신을 너무 어리게만 보는 부모가 아이는 답답하다. 그래도 아이는 부모에게 환하게 웃어준다. 그래야 앞으로도 선물을 사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아이 노릇도 참 피곤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촬영 협조 롯데백화점
아이는 우울하다. 아이가 책을 읽을 때마다 환하게 웃던 엄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도 덜컥 책을 사왔다. “올해는 네가 착하게 굴어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셨네”라 는 유치한 말과 함께. 자신을 너무 어리게만 보는 부모가 아이는 답답하다. 그래도 아이는 부모에게 환하게 웃어준다. 그래야 앞으로도 선물을 사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아이 노릇도 참 피곤하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촬영 협조 롯데백화점
이 병원 손석한 원장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나 자신의 생일 등을 손꼽아 기다리는데 기대만큼의 선물을 받지 못했을 때는 좌절감이 더 커진다”며 “아이들의 실망이 직접적인 말보다 행동의 변화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례들은 이른바 ‘크리스마스 스트레스’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의 단면들이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 생일과 같은 특별한 날을 1년 내내 기다린다. 행복한 날일수록 기대는 한껏 부푸는 법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선물을 받지 못하거나 친구들의 선물보다 작은 것을 받았을 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에 놀이동산에 가고 싶다는 아이를 인근 공원에 데려가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슬픔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아이들은 그나마 나은 편. 아이들은 만 4세(48개월)가 되면서부터는 실망감이나 슬픔을 숨기는 방법을 배운다. 다신 선물을 받지 못할 거란 걱정에 겉으로만 ‘기쁜 척’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타의 선물을 받고 환하게 웃던 사랑스러운 자녀가 속으로는 말 못할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알고 있는가.

○ “속상하지만 괜찮아요”가 무슨 말?


동아일보 주말섹션 ‘O2’는 6∼9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설문은 서울 동작구의 어린이집(6, 7세 36명)과 강북구의 초등학교(8, 9세 48명)에서 이뤄졌다. 질문은 이랬다. 우선 크리스마스에 제일 받고 싶은 선물과 누가 그 선물을 줬으면 가장 좋을지를 물었다. 그러고는 “만약 네가 원하는 선물 말고 다른 걸 받으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만약 (선물을 줬으면 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선물을 주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라고 질문했다.

내년에 초등학생이 되는 7세 남자아이는 “네가 원하는 선물 말고 다른 걸 받으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란 질문을 받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세상의 모든 고민을 짊어진 듯한 표정이 아이의 얼굴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결국 아이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설문에선 이 아이처럼 원하지 않는 선물을 받더라도 “좋다” “괜찮다”라고 답한 아이들(52.4%)이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그런데 이 대답을 조금만 더 살펴보면 한 가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상당수의 “좋다” “괜찮다”는 답변 앞에 “그래도 엄마가 사주는 거니까” “우울하지만” “조금 슬퍼도” 등의 말이 놓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원하는 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받았을 때의 기분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63.1%가 “좋다” “괜찮다”라고 대답했지만, 이 역시 상당수는 “속상하지만” “누가 주던 선물은 똑같으니까” “안 주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등의 단서가 붙었다.

문용린 서울대 교수(교육학)는 이를 ‘자기훈계’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일종의 정서규제 능력(정서표현, 특히 부정적 정서표현을 통제하는 능력)이죠. 앞에 수식어로 붙는 말들이 아이들의 솔직한 표현이자 ‘팩트’입니다. ‘좋다’ 또는 ‘괜찮다’는 말은 ‘그래야 한다’는 일종의 자기훈계인 셈이죠.”

아이들은 만 2세가 넘으면 상황에 맞는 적응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니 대여섯 살이 되면 마음에 안 드는 선물이라도 좋아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 이미 학습돼 있는 것이다.

모든 부모가 크리스마스 때마다 아이들이 원하는 선물, 원하는 이벤트를 감당할 능력을 갖고 있진 않다. ‘O2’가 ‘소비자리서치패널 틸리언’에 의뢰해 6∼9세 자녀를 둔 부모 5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도 그랬다. 응답자의 88.7%는 자녀가 원하는 선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녀가 가장 원하는 선물을 사 주겠다”는 답변은 10명 중 6명 정도(63.2%)였다. ‘교육상 좋은 선물을 사 주겠다’(15.7%)와 ‘가격이 적당한 선물을 사 주겠다’(14.9%)라고 대답한 부모들에겐 선물을 결정하는 데 가격과 교육이 주요 고려사항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아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계획인가’라는 질문에도 절반 정도(54.9%)만 ‘자녀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라고 응답했고, 3명 중 1명은 비용(28.3%) 또는 교육(7.7%)을 고려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아이의 기대와 부모의 의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부모의 사정이나 가정환경을 객관적으로 헤아리지 못한다. 다만 학습에 의한 자기훈계를 통해 마음에도 없는 ‘착한 소리’를 할 뿐이다. 부모가 자녀를 기특해하는 동안 스트레스가 아이들의 복잡한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박혜원 울산대 교수(아동가족복지학)는 “원치 않은 선물을 받거나, 원치 않은 곳에 놀러갈 때 그냥 싫다는 표현을 해버려도 되지만, 부모를 생각해서 억지로 즐거운 표정을 지어야 한다는 게 결국 아이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고 강조했다.

#2. ‘상대성’이 주는 치명적인 함정


미국 워싱턴대의 정신의학자인 토머스 홈스 교수와 리처드 라헤 교수가 고안한 ‘홈스 앤드 라헤의 스트레스 지수’를 살펴보자. 삶의 여러 변화 중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것은 배우자 사망(100점)이나 이혼(73점)이다. 의외로 결혼(50점)이나 뛰어난 성과(28점) 등 긍정적 사건에도 상당한 스트레스가 따른다. 결혼은 실직(47점)이나 은퇴(45점)보다도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 흥미롭게도 휴가(13점)나 크리스마스 및 명절(12점)도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이다.
▼ ‘산타가 올지 안 올지’ 일부 어린이에겐 심각한 고민거리 ▼

‘달콤한 크리스마스’라고 적힌 커다란 양말 모형이 천장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아이들에게 산타가 선물을 담아 둔다는 양말은 크면 클수록 좋다. 하지만 양말을 채우는 것처럼 아이의 마음도 모두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달콤한 크리스마스’라고 적힌 커다란 양말 모형이 천장 여기저기 매달려 있다. 아이들에게 산타가 선물을 담아 둔다는 양말은 크면 클수록 좋다. 하지만 양말을 채우는 것처럼 아이의 마음도 모두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물론 이는 성인에게 적용하는 기준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아이들도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어른들이 결혼이나 로또당첨 등 긍정적 사건 때문에 강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아이들도 좋은 날을 앞두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인지영 경북대 교수(아동학)도 “아무리 긍정적인 이벤트라고 해도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받는 자극을 넘어선다면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몇 밤을 더 자야 크리스마스인지, 올해는 내가 기도한 대로 선물을 받을지, 산타할아버지가 과연 나를 찾아올지 등 아이들은 나름의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더 큰 문제는 상대성에서 비롯된다. 기대가 충족되지 못했을 때의 실망감이나 또래와의 비교를 통한 상대적 박탈감이 그것이다. 어른들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등 기뻐해야 할 날에 오히려 부부싸움이 더 잦지 않는가.

“유아기 후기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아이들은 자신의 선물을 친구들과 비교하는 능력을 조금씩 갖게 됩니다. 크리스마스처럼 친구들에겐 긍정적인 일이 내겐 부정적이라면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받겠죠. 또 이 나이대의 경우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한 단편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아’라고 단정해버릴 수도 있습니다.”(인 교수)

아이들은 성인에 비해 스트레스에 더 취약하다. 미국의 교육학자 캐럴 시펠트 교수(아동학)는 메릴랜드대 재직 당시인 1984년 ‘유아의 성장과 발달: 스트레스의 원인’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논문에서 “유아는 성인과 달리 스트레스의 원인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데 필요한 지적 기술과 언어적 발달이 제한돼 스트레스가 누적된다”고 밝혔다. 2007년 삼성복지재단이 주최한 제15회 ‘건강한 환경 유능한 어린이 학술대회’에서 김붕년 서울대 교수(소아정신과)도 아동 스트레스의 심각성을 경고한 바 있다. 학령기 전기인 4∼7세는 ‘양심에 비춰 잘못된 것이 없었을까’란 초자아 불안이 동반되는 심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데, 이것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자아감 손상이나 우울감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 소외계층 아동 상대적 박탈감 더 심해


이맘때 “나쁜 어린이에게는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안 준다”는 말을 해보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학자들은 이를 두고 “부모들이 크리스마스나 산타를 훈육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숙 덕성여대 교수(심리학)는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아이들은 ‘엄마 말을 안 들어서 야단을 맞았는데 그 때문에 선물을 못 받으면 어떡하나’라는 걱정을 하기 마련”이라며 “이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또 다른 요소”라고 우려했다.

이런 부모와 자녀 간 밀고 당기기는 경영학적 관점(빅터 브룸의 기대이론·Expectancy Theory)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이때 가정은 기업, 부모와 자녀는 각각 경영자와 조직원이 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보상을 제시함으로써 ‘착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자신의 행동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고, 만약 기대에 못 미칠 경우에는 성과가 보상으로 연결되지 않은 데 대한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이는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를 자녀에게 똑같이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형제나 친구와 선물을 비교한 뒤 실망한 아이들이 갑자기 문제행동을 보이는 것은 스테이시 애덤스의 ‘형평성 이론’으로 설명된다. 이승윤 홍익대 교수(경영학)는 “한 조직이 인사관리를 할 때 목표를 너무 쉽거나 어렵게 설정할 경우 효율성이 떨어진다”며 “부모가 제시하는 목표와 보상도 적절한 수준이어야만 아이들의 심리적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동기부여 효과를 가질 수 있다”고 충고했다.

초등학교 1, 2학년의 경우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산타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산타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할 경우 선물을 받지 못할까 봐 ‘믿는 척’을 하는 아이들이 꽤 있다. ‘기쁜 척’, ‘믿는 척’ 등 본심과 다른 행동에는 필연적으로 스트레스가 따른다.

이와 관련해 김유숙 서울여대 교수(교육심리학)는 아이들에게 물질적 보상보다는 상상의 즐거움을 심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그는 “사실 유아기나 아동기는 물건 자체보다는 판타지에 대한 욕구가 많고, 이를 물질적으로 환산하는 능력은 떨어진다”며 “아이들이 고가의 선물을 원하고, 또 받지 못했을 때 실망하는 것은 결국 자녀의 물질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 부모들의 영향 탓”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아이들의 경우 크리스마스 스트레스가 더 심할 수 있다. 평소의 결핍감이 특별한 날이 될 때 선물에 대한 갈망 같은 물질적 욕구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부모는 무조건 집안 형편을 강조하기보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자체보다 선물을 주고받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거나,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가족 및 이웃과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데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 좋다. 가족, 이웃과 함께 저렴하면서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놀이를 하거나 근교 여행 등을 가는 것도 괜찮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