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신경숙은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며, 자연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한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겨우내 비료 포대를 타던 언덕배기에는 쑥 이파리가 군데군데 남은 눈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들판에는 보리순이 올라오고 물길을 따라 늘어선 꽃나무에는 노란 몽우리가 돋아났다. 따사로운 볕이 차갑던 공기를 막 밀어붙이던 무렵, 자연의 생명들은 득시글득시글 피어났다. 봄의 기척이 여기저기서 아귀다툼하듯 드러나던 그 길로 상여(喪輿)가 나갔다. 오래오래 일생을 다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 풍경. 신기하게도 지난겨울 아이들과 “누구네 할머니가 아프단다”, “누구네 고모가 아프단다” 하고 떠들었던 그 이야기 속의 사람들이었다. 인간의, 자연의 생멸(生滅)을 몸으로 겪으면서 신경숙(48)이 성장한 곳. 태어나서 열다섯까지 성숙했던 그곳. 정읍(井邑)이다. 》 ○ 마지막 기차는 11시 57분에 떠나네
오후 5시 넘어 시작된 고등학교 산업체특별학급 수업은 오후 10시쯤 끝났다. 낮에는 구로공단의 가전제품 제조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그는 무작정 서울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열다섯에 부모를 두고 떠나온 고향, 전북 정읍으로 가는 마지막 기차는 오후 11시 57분에 떠났다. 뻔한 형편에 끊은 표는 입석이 대부분이었다. 호남선 완행열차는 새벽녘 신경숙을 정읍역에 내려놓고 갔다. 어머니와 집에서 단 몇 시간을 보낸 뒤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다시 힘든 일상이 반복됐다.
“사춘기 때는 없는 것도 만들어내서 그리워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잖아요. 나는 떠나온 곳이 확실히 있고 거기에 보고 싶은 대상들이 다 있었으니까요. 시간만 나면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게 내 모습이었어요.” 몸은 서울에 있는데 항상 시선은 정읍으로 가있는 시기는 이향(離鄕) 후 10여 년이 지날 때까지 지속됐다.
그의 마음속에 순하게 남아있는 공간, 정읍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가 태어난 마을 과교리(科橋里·현재 정읍시 과교동)와 그가 다니던 초중학교가 있던 정읍 시내까지의 약 4km 거리다. 그는 초등학교 6년은 걸어서, 중학교 3년은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다녔다.
들꽃이 피고 아카시아가 우거져 있는 길, 신작로를 통과해 학교로 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오는 시간. 그 시간, 그는 계절이 들고 나는 기색을 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지냈다. 봄이 돼서 사람들이 밭에 나와 씨앗을 뿌리고 땅을 일구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학교에 갔다. 신발을 신고 길을 걸으면 얼었던 땅이 폭삭폭삭 꺼지는 느낌이 왔다. 교실에 들어가서 보면 바짓단이 아침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누구한테 들어서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왔나보다가 아니었다. 책을 읽어서 절기(節氣)의 양상을 익힌 것이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살갗으로 느껴서 계절의 기척을, 세상의 풍경을 온몸으로 안았고, 알게 됐다. 그 공간에서 그렇게 신경숙의 문장은, 문체는 자라났다.
그의 마을 이쪽과 새로 생긴 저쪽, 새터 사이를 기찻길이 가로질렀다. 서울에서 타면 광주와 여수 같은 데로 내려가던 기차에서는 승객들이 차창 밖을 내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저 기차를 타고 다른 세상으로 나갔으면’ 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기차역에서만 서야 하는 기차가 가끔 마을 가운데 서있었다. 철길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던 취객이나, 기차가 달려오는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사람들이 죽었다. 철커덕 소리를 내는 강철바퀴는 자전거나 자동차와 달리 달려오는 속도를 이기지 못했다. 기찻길은 동경(憧憬)과 소멸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런 느낌 역시 정읍에서 흡수한, 내 인생의 기본에 스며든 것들이에요. 서울에서 살게 된 시간이 더 길어졌어도 아직 남아있어요. 나한테는 젖줄 같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사람이 준 상처, 사람이 치유하다
신씨들이 꽤 살았던, 100호쯤 되던 마을에서 그는 봄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걷을 게 없다는 걸 보며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걸 몸소 보여줬다. 농사일은 혼자 못하는 일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오늘은 누구네, 내일은 누구네, 이렇게 일할 날짜를 정했다. 그렇게 정한 집에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서 함께 일했다. 점심이나 새참을 먹을 때는 일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들도 불러서 같이 먹었다. 그의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줄 정도로 손이 컸다. 종부(宗婦)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음식을 장만하든, 뭘 하든 많이 했다. 집에 오는 이는 누구든지 다 챙겨 먹였다. 그런 풍경은 그에게 사람에 대한 온기를 느끼게 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친밀함이 들끓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제가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난다’는 말을 비유로 잘 써요. 사람에 의해서 고통이나 상처를 받아도 역시 위로를 받는 건 사람에 의해서라는 거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게 해 준 게 정읍에서 보낸 어린 시절 같아요.”
형제가 많은 그의 집을 들어서면 마루 아래 댓돌에는 신발들이 그득했고, 마당에는 동물들이 가득했다. 암탉이 알들을 품어 병아리를 까서는 자기 깃털 아래 품고 마당을 종종거리며 다녔다. 마루 밑에서는 강아지를 잔뜩 낳은 어미 개가 젖을 먹였고, 돼지 막(幕)에서는 암퇘지가 새끼들을 품었다. 늘 저녁밥을 먹고 나면 그는 어머니와 함께 식구들이 먹고 남은 찌꺼기나 누룽지 같은 걸 다시 덜어서 개 밥그릇에 부어주고, 돼지 밥그릇에 부어주곤 했다. 사람끼리, 동물끼리, 사람과 동물끼리 체온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지금도 그가 작품을 쓸 때 자연에 대한 묘사를 한다거나,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묘사를 할 때 그도 모르게 30년도 넘은 그때 정읍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는 농촌을 전원(田園)으로 생각하는 사람과는 반대의 느낌을 갖고 있다. 자연의 그 무자비함이란…. 사람 손을 여든여덟 번 거쳐야 거둘 수 있다는 쌀을 추수도 하기 전에 여름 폭우가 쓸어가는 걸 보고 자랐다. 겨울의 폭설이 아름드리나무를 부러뜨리는 것도 봤다.
서로 협력하고 배려하는 마을 사람들이지만 싸울 때면 눈으로 보이지 않던 역사들이 드러났다. 전쟁이 남긴 상처가 어떻게 그들 내면에 새겨져 있는지가 서로 언성을 높일 때 나타났다. “네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어?” “너는 그때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의 서향(西向) 집 마루에서 올려보면 저만치 장성고개가 있다. 빨치산과 국군의 치열한 공방과 그 사이에 끼인 사람들. 그 고개가 감춰둔 슬픈 이야기들이 사람들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어쩌면 그가 시인이 아니고 소설가가 된 바탕이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자연과, 태어남과 죽음에 얽힌 숱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컸다.
○ 물이 있는 곳 길이 있는 곳
인생은 참 재미있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지난해 여름부터 올여름까지 미국 뉴욕에서 머물 때 그가 가장 많이 생각한 곳은 정읍이 아니라 서울이었다. 정읍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할 때도 그저 부모님 생각일 뿐이었다. 서울에서 그의 발자국을 찍어가며 삼십 몇 년을 사는 동안 그의 고향이 서울이 된 것이다. 서울에서는 ‘내가 다니던 길이 있는 거기’라고 하면 정읍이었지만, 그 세월 동안 서울에 그려놓은 그의 동선(動線)이 정읍과 거의 비슷한 비중이 된 셈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집에 다녀올게”라고 말하면 “정읍 다녀올게”라는 뜻이었던 말버릇도 이제는 거의 없어졌다.
사실 현재의 정읍에선 그가 기억하는 길의 자취가 거의 사라졌다. 도랑이 흐르고 벼, 보리, 버들개지가 어우러져 자라던 샛길들도 온데간데없다. 길을 따라서 들판으로, 신작로로, 어디론가 항상 흘러가던 물길도 콘크리트에 묻혔다. 그가 자신을 비춰보고, 수면에 비친 풍경을 지켜보던 그의 집 우물도 함석판으로 덮인 지 오래다. 고여 있거나 흐르던 물이 눈에 보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변하지 않고 남아있을 때의 정읍은 그 모습 그대로 그의 상상력을 자극해 작품에서 재탄생했고, 인간이 편리한 대로 살면서 뭔가 자연스럽지 못하게 막아버린 물과 길의 모습은 그걸 뚫고 나가는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미움, 원망같이 인생의 모질고 질긴 시간들이 끼어들기 전에 정읍을 떠나왔기 때문에 고향은 내 마음속에 순수하게 남아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내 인생의 공간이기도 하고, 내 문학의 공간이기도 하지요.”
신경숙이 사람 몸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위가 손이다. 다른 사람의 손을 보기도 하고 잡기도 하면서 자신이 체온을 전한다. 소통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손이 너무 따뜻해서 미안할 때도 있고, 잡았던 손을 떼야 할 타이밍을 놓쳐 어쩔 줄을 몰라 식은땀을 뻘뻘 흘릴 때도 있다. 자신의 삶과 문학의 근원(根源)이 되는 공간, 정읍을 이야기할 때 그의 두 손은 서로 쓰다듬으며 서로 보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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