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4050 주부들 극장행 러시, 의외로 야한 영화 즐긴다는데…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24일 03시 00분


■ 요즘 달라진 시네마 풍경

“저, ‘그 영화’ 4장 주세요.”

“고객님, 그 영화라뇨? 영화 제목을 정확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막 문을 연 서울 시내의 한 극장. 중년 여성 한 명이 매표원과 ‘선문답’을 하고 있다. 저 멀리 일행인 듯한 여성 3명이 수줍게 눈을 반짝인다. 순간 팀장급 직원이 다가와 한 마디 한다.

“아… 어머니, 그 영화요? 제가 발권해 드릴게요.”

대체 무슨 일일까? 위의 사례는 최근 몇 년 사이 40, 50대(특히 40대) 중년 여성들이 극장을 많이 찾으면서 벌어지게 된 일 중 하나다. 영화업계 관계자들은 2∼3년 전부터 주부들의 객석 점유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국내 최대 극장체인인 CGV의 경우 전체 여성 관객(올 상반기 기준) 중 40대 여성 관객의 비중이 20%나 된다. 이는 영화관의 최대 ‘큰손’인 20대 후반(24%) 및 30대 초반(20%)과 비슷한 수치.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여성 관람객 중 4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대 초반에 불과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주부 관객들의 극장 점유율이 부쩍 높아졌다. 주부 관객들은 주로
아침에 극장을 찾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등 독특한 행태를 보인다.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오른쪽의 여성은 ‘색계’의 주인공 탕웨이. 필름 속의 영화는 위부터 ‘써니’ ‘맘마미아’ ‘쌍화점’이다. 동아일보DB
최근 몇 년 동안 주부 관객들의 극장 점유율이 부쩍 높아졌다. 주부 관객들은 주로 아침에 극장을 찾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등 독특한 행태를 보인다.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오른쪽의 여성은 ‘색계’의 주인공 탕웨이. 필름 속의 영화는 위부터 ‘써니’ ‘맘마미아’ ‘쌍화점’이다. 동아일보DB
극장 관계자들은 2008년을 기점으로 중년 여성들의 극장 나들이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한다. ‘맘마미아‘(2008년), ‘워낭소리’(2009년), ‘울지마 톤즈’(2010년), ‘써니’(2011년) 등이 중년 여성들의 큰 호응을 얻은 대표적 작품이다.

중년 여성 ‘극장 러시’의 가장 큰 이유로는 육아로부터의 해방이 꼽힌다. 주부들의 여가시간은 자녀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그러나 이들 세대 자체의 특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젊은 시절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받았던 이들이 다시 ‘문화 소비’에 나섰다는 점을 간과하면, 그 윗세대와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최근에는 극장들도 중장년 여성을 겨냥한 영화를 연이어 개봉하기 시작했다.

○ 왜 그들은 무리지어 영화를 볼까


기자는 실제 현장에서 주부들의 영화 열풍을 실감할 수 있었다. 21일 오전 10시, 서울 광진구의 한 극장. 이 극장은 소위 ‘젊음의 거리’에 있다. 하지만 극장 손님 중 절반 정도는 40, 50대 주부들이었다. 대기석 의자에 앉은 20명 중 9명이 주부였으며, 매표소 앞에 있는 7명 중 뭔가 다른 일을 보는 듯한 아저씨를 제외한 나머지도 주부였다. 이미 상영 중인 9∼10시에 시작한 영화에는 더 많은 주부 관객이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보통 브런치(아침+점심)를 먹거나 커피를 마신 뒤 영화를 보거나, 영화 관람 후 점심을 함께 먹는다.

주부 관객들은 아침 일찍(조조 또는 2회차) 영화를 많이 본다. 남편의 출근과 아이들의 등교 후 한가한 시간을 주로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주부 관객들의 영화 관람 행태는 여러 면에서 다른 연령층, 성별의 사람들과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이들은 ‘무리를 지어’ 영화 보기를 즐긴다. 보통 4, 5명이 함께 영화를 보며, 단둘이 보는 경우는 드물다. 이는 주부 모임의 상당수가 영화 관람 및 식사(또는 티타임) 중심으로 열린다는 것과 연관이 있으며, 관람 후 영화에 대한 수다를 즐기는 주부들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극장에서 만난 한 주부는 “3명 이상이 모여야 이야기가 재미있어지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렇지만 남성 관객과 다른 주부들만의 가장 큰 특징은 ‘더치페이’에 있다. 남성들은 보통 한 사람이 관람료를 계산하면 다른 사람들이 음료와 팝콘, 식사를 산다. 반면 주부들은 철저히 모든 것을 더치페이로 해결한다. 카드 사용 할인이나 적립금을 꼼꼼하게 챙기는 것도 특징. CGV의 예술영화 프로그램 ‘무비꼴라쥬’의 조윤진 프로그래머는 “주부 10명이 영화를 보러 오면 매표소에 신용카드가 10개, 할인카드가 8개 정도 등장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여성 관객들은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남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는 친구들과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여성 특유의 집단 성향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 남성들은 친구끼리 극장에 가더라도 자신이 한 번 본 영화는 웬만하면 다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영화 ‘써니’를 제작한 이안나 알로하픽쳐스 프로듀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써니’를 고교 동창, 동네 친구 등과 함께 여러 번 봤다는 이야기를 전해줬다. “따님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인가요?”라고 묻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과속스캔들’은 한 번만 보셨거든요.”

○ 통속과 예술을 아우르다

그렇다면 주부들은 어떤 기준으로 영화를 고를까. 조 프로그래머는 “대중적 흥행코드 외에 몇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말했다.

그 첫 번째는 탄탄한 스토리텔링. 이미 다양한 드라마를 시청해 눈이 높아진 주부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어도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 영화에 높은 점수를 준다. 중동의 종교 갈등과 전쟁을 배경으로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그린 ‘그을린 사랑’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둘째, 예술성과 서정성이다. 40, 50대 주부들은 난해한 영화를 의외로 많이 즐긴다. 상식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음악만으로 영화를 이끌어가는 ‘바흐 이전의 침묵’은 중년 여성 관객들이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케이스다. 이런 이유로 CGV는 예술영화 상영 프로그램인 ‘무비꼴라쥬’를 운영하고 있으며, 롯데시네마도 오페라나 뮤지컬을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덩달아 예술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극장들도 재미를 보고 있다.

셋째는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다. 특히 올해 개봉한 ‘써니’는 학창시절을 떠올리는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700만 이상의 관객을 기록했다.(중장년 예매율이 30%에 육박하기도 했음)

또 하나, 주부 관객들은 의외로 ‘야한’ 영화를 많이 본다. ‘쌍화점’ ‘방자전’ ‘하녀’ 등은 모두 주부들의 단체 관람 덕을 톡톡히 봤다. 일부 지역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이 조를 짜서 영화를 봤다’는 소문이 돌 정도. 그러나 “남성들이 선호하는 ‘무작정 야한 영화’는 싫다. 우리는 야하지만 예술성이 강한 영화를 선호한다”는 게 기자가 만나본 주부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선 ‘단체 관람을 주로 하는 만큼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여하튼 중년 여성들이 야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우선 호기심 때문이다. 그래서 부끄러워하면서도 단체로 극장에 간다. 기사 서두에서처럼 친구들이 용감한 한 명에게 표를 사오라고 시키기도 한다. 영화를 관람한 후 주부들의 대화 ‘수위’는 꽤 높은 편이다. 경기 용인시에 사는 최모 씨(43)는 “동네 주부 모임에서 어떤 아줌마가 ‘색계’ 중의 한 장면을 따라하다 다리가 부러졌다는 얘기가 나와 한참 웃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편 주부 관객 사이에서는 입소문이 그 어느 세대에서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사는 황부영 씨(41)는 “주변 사람들의 평이 좋은 영화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고 말했다. 일단 ‘검증’을 받았으니 실패 확률이 낮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보통 영화의 흥행 여부는 첫 번째 주에 결정되고, 관람료 수입도 첫 주 이후 하향곡선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중년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영화는 개봉 첫째 주보다 둘째 주 이후의 흥행 성적이 더 좋은 경우가 종종 있다. 따라서 극장 측에서 일반 영화의 경우보다 조금 더 기다렸다 장기 상영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P.S.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꼭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 특히 남성들이 있다. 남편이 힘들여 벌어다 주는 돈을 여자들이 편하게 쓰고 다닌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집에서 일주일만 살림을 해 보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믿는다. 남편과 아이들을 챙긴 후 조금이라도 아끼겠다고 조조영화로 문화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 함부로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게다가 남자들의 술값이나 담뱃값에 비하면 영화 관람료나 밥값은 정말 ‘껌값’ 아닌가. 영화 관람은 주부들이 즐기는 최소한의 ‘작은 사치’가 아닐까.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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