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에서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방법 같은 건 배우지 못했어. 그곳에서 배운 건 단 하나, 살아남으려는 용기를 가지지 못한 자는 싸우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는 거야.”
- 만화 ‘마스터 키튼’ 중에서 》 간만의 선후배 술자리.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겠지만, 이직(移職)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직종, 경력도 제각각인데 다들 ‘또 다른 삶’을 꿈꾸고 있었다. 임금부터 처우까지 이유도 천차만별. 기우는 술잔마다 묘한 넋두리가 넘쳐났다.
“근데 직장을 옮긴다면 제일 중요한 기준은 뭐야?”
“돈.” “난 몰입도.” “칼퇴근이지.” “회사 분위기가 좋아야 해.”
한참 떠드는데 한 선배가 종지부를 찍었다.
“다 필요 없다. 마누라가 허락하는 곳. 이젠 내 몸이 내 것이 아녀.”
일동, 원 샷(one shot).
일본 작가 우라사와 나오키(浦澤直樹)는 대표작을 고르기 힘든 만화가다. ‘몬스터’ ‘20세기 소년’ ‘플루토’에 최신작 ‘빌리 배트’까지. 말랑말랑한 ‘해피’나 ‘야와라’도 상당히 수준급이다. 이 양반은 뭔 재능을 이렇게나 많이 타고났나 싶을 정도다.
어린 시절 ‘인디애나 존스’를 꿈꿨던 탓일까. 그의 작품 중 내가 개인적으로 최고로 치는 것은 언제나 ‘마스터 키튼’이었다. 다양한 모험 속에서 숨겨진 문명을 마주하는 인생. 작은 파편 하나에서도 고대의 숨결을 느끼는 혜안. 책장을 넘기다 ‘고고학과에 갔더라면’ 하고 괜한 상상에 빠지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 작품은 등장인물과 사건 소재가 맛난 비빔밥처럼 버무려져 놀라운 화학작용을 일으킨다. 영국육군공수특전단(SAS) 교관 출신에 옥스퍼드대 고고학과를 나온 다이치 키튼. 그래서 그를 둘러싸고 옴니버스로 펼쳐지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가볍지가 않다. 루마니아 독재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연관된 마지막 에피소드처럼 굵직한 현대사를 다룬 얘기들이 상당히 많다. 진위를 떠나 이만큼 방대한 사전 취재를 바탕에 뒀다는 한 가지 이유로도 이 만화는 명작으로 꼽을 만하다.
하나 만화의 판타지적 요소를 벗겨내고 주인공에게 현실의 잣대를 들이밀면, 이 남자의 삶은 그다지 녹록지 않다. ‘보따리 장사’라 불리는 대학 강사를 전전하고, 보험조사원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부모는 이혼했고 본인 역시 아내와 헤어진 처지. 평생소원인 도나우 강 유적 탐사는 학계의 관심은커녕 여비 마련도 어렵다. 키튼은 매우 능력 있고 흥미로운 캐릭터지만, 실상은 그냥 ‘프리랜서 이혼남’이다. 세간의 기준에서 보자면 오히려 흠집 많은 루저에 가깝다.
뭣보다 키튼은 ‘꿈과 현실’이란 두 영역의 경계에서 줄곧 줄타기를 한다. 눈은 하늘을 향했으나 발은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형국이다. 물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서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많다. 언뜻언뜻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모습도 엿보인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아내를 향한 마음도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점들 덕분에 키튼이란 인물은 독자와의 ‘공감대’란 크나큰 매력을 획득한다. 그의 삶이 뻔히 직장 잘 다니면서도 마음 한쪽에 이직을 떠올리는 우리네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 이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이도 있다.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하지만 원했던 직장이라도 입사 뒤 실망하거나, 노력해도 좌절이란 쓴맛만 보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연과 불확실이 세상에 혼재하는 한 누군들 두렵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까.
다만 하나만 기억하자. 꿈을 이루건 현실에 안착하건 혹은 경계에서 흔들리건, 그 어떤 결정도 비난받거나 폄하돼선 안 된다. 부인이 허락하는 직장으로만 이직하겠다는 선배.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의 선택 기준은 결코 농담이 아니다. 이직의 기준이 바로 가족, 더 나아가 그들의 생계이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를 재는 저울은 어디에도 없다.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논하는 편견이 있을 뿐이다.
ray@donga.com 레이 동아일보 소속. 처음에 ‘그냥 기자’라 썼다가 O₂ 팀에 성의 없다고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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