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녀의 남자친구가 카카오톡을 통해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문장은 너무나도 간단명료했습니다. ‘지겹고 재미없다. 헤어지자.’ 이 짤막한 이별 통보를 받고 그녀는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페이스북 등 메신저 앱에서 자신의 이름이 제외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카톡이별’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며칠 동안 밥도 못 먹고 아르바이트도 못 하던 그녀는 분한 마음에 자신도 남자친구와 맺었던 일촌관계를 끊고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화번호를 지우고 숱하게 찍었던 커플 사진도 모조리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남자친구가 술에 취해서 잘못했다고, 다시 만나자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남자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두 개의 문장을 문자로 날렸습니다. ‘지겹고 구역질 나. 꺼져 버려.’
스마트폰 가입자가 2000만 명을 넘어선 시대, 젊은 세대에서는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문자메시지, e메일 등을 통한 ‘전자이별’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전자(electron)’와 ‘이별(離別)’이라는 말의 조합 자체가 인류가 지난 20세기 동안 정서적으로 누적시켜 온 관계미학의 양식을 단번에 파괴해버리는 기계적 정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자이별이 보편화된다면 헤어진다고 눈물 짜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자살을 감행하는 사람들은 아날로그적이고 원시적인 감정의 소유자로 손가락질을 받거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온 한국적 이별의 정서는 누가 뭐래도 김소월의 ‘진달래꽃’이었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로 시작해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끝나는 짧은 시 한 편을 읊조리며 우리는 민족의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한의 정서를 되새기곤 했습니다. 아직 낭만이 남아 있던 시대에는 정호승 시인의 ‘이별노래’가 이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떠나는 그대/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그대 떠나는 곳/내 먼저 떠나가서/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노을이 되리니’라는 절제된 표현에서 사람들은 이별을 감내하는 깊은 여운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인생의 흐름은 만남과 헤어짐의 파노라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별을 하는지 우리는 미처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던 학창시절의 친구들, 군대나 사회에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여행지에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강물이 흐르듯 우리네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줄기찬 연속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자각한다면 이별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큰지도 절로 알게 됩니다. 만남 반 이별 반, 그것이 곧 인생입니다.
새로운 만남에만 집중하고 헤어짐을 등한시하는 일은 인생을 절반만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에서의 모든 만남이 이별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새로운 만남과 이별은 가치상 다를 게 없습니다. 전자이별이 몰고 오는 상처, 궁극적으로 ‘전자만남’까지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이어질 터이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날이 갈수록 기계적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적인 만남과 헤어짐, 인간에게 해로운 전자파 같은 사랑의 시대를 예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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