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4일, 이날은 내가 지난해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공연했던 ‘도시이동연구 혹은 연극 당신의 소파를 옮겨드립니다’란 작품으로 동아연극상 새개념연극상을 수상하는 날이었다. 3분 안팎의 수상소감을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전날 밤 그동안의 과정을 돌이켜봤다.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책으로부터 접했던 이상적인 연극론들과 실천가들의 꿈을 꿈으로만 남겨두지 말고 한 번 우리가 만들어 보자는 치기 어린 생각으로 결성됐던 크리에이티브 VaQi. 그런 마음들을 현실 세계에 몸으로 그려 나가는 작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소중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 직전 나를 포함한 단원들은 좀 지쳐 있던 상황이었다. 광화문에서의 작업과정이 워낙 거대하기도 했거니와 여름에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하면서 빚까지 진 상황이었다. ‘대안연극’의 추구뿐만 아니라 우리도 이제는 대학로 안에서 장기공연을 할 수 있는 상업연극 한 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까지 대두된 시점이기도 했다.
시상식장에서 호명돼 단상으로 올라갈 때만 해도 나는 담담했다. 트로피와 상장을 받고 단상에서 객석을 바라보니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꾹 참자고 다짐했다. 공개석상에서, 그것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이 길을 걸어가는 연극계 선배님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뿔싸. “묵묵히 믿고 지켜봐 주시는 부모님께 감사….” 말을 꺼내는 순간 참고 있던 뜨거운 기운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 뒤론 어떻게 말을 이어 나갔는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진정됐다 싶으면 그 기운이 또다시 솟구쳤다. 약속한 3분이 넘었고 객석에선 웃음과 격려의 박수가 터졌다. 결국 “언제 이 자리에 다시 서게 될지 기약할 수 없으니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겠다”라면서 10분 넘는 장광설을 늘어놨다. 그때 말하고자 했던 요지는 이렇다.
대학생 시절 은사님께서 3학년 실습수업을 마무리하면서 “하늘의 나는 새들도 먹고사는데 설마 너희들이 굶어 죽겠느냐. 걱정하지 말고 길을 가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구절을 인용한 이 말씀은 이후 내 작업의 초석이 됐다. 단순히 생계 걱정에 대한 위안 때문이 아니었다. 인생이란 게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나’를 내던지는 믿음과 실천임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연극이 인간사회 안에서 수행할 수 있는 기능과도 맞닿는다. 오늘날 사회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 없는 듯 보이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절대빈곤, 사회양극화, 환경문제)는 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감성, 감정과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이고 연극은 사람들의 감성과 감정의 영역을 고양하고 단련하는 장이 돼야 한다.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 많은 연극계 선배님이 웃으면서 어깨를 감싸주었고 동료들은 놀리기 바빴다. 부끄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후련했다. 아직은 시작에 불과했던 지난 과정을 돌아보았고, ‘울음’을 통해 공연예술가로서 미래의 다짐을 한 듯했다.
그날 신인여배우상을 수상한 연희단거리패의 배보람 씨도 “사실…저희 많이 힘들거든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젊은 연극인들의 눈물겨운 고백이 이어지자 격려사를 하러 단상에 올라간 어르신들이 하나둘 준비해온 격려사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즉석연설을 하셨다. “오늘 시상식을 보면서 어떤 연극 못지않게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동아연극상이 얼마나 귀한 상인지 온몸으로 느꼈다”는 말씀이었다.
올해로 연극 공부 10년차. ‘삼십대’라는 또 다른 10년을 준비하기 위해 1년여간의 영국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어린 양의 ‘울음’이지만 언젠가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욱더 힘껏 모아 세상을 향해 ‘사자후’를 토해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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