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다. 동양에서는 내일을 위해 어떤 나무를 심을까. 답은 귤나무다. 스피노자가 사과에서 희망과 평상심을 찾았다면 동양에서는 귤을 보며 미래를 준비했다.
역사적으로 귤은 후손을 위한 과일이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해 선인들은 귤나무를 심었다. 옛날에는 귤이 엄청나게 비싼 고수익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서는 귤나무 몇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졸업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도 불렀다.
귤이 대학나무가 된 역사는 뿌리가 깊다. 3세기 무렵 중국에서도 후손의 미래를 위해 귤나무를 심었다. 자손에게 재산 대신 감귤나무 1000그루를 심어 물려준다는 감귤천수(柑橘千樹)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단양 태수로 이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마천이 ‘사기(史記)’ 식화지(食貨志)에 “강릉에 귤나무 천 그루만 있으면 식읍이 있는 제후가 부럽지 않다”고 쓴 것을 읽고 가족 몰래 감귤나무를 심어 자손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고사다. 단양, 강릉은 공교롭게도 우리 지명과 같지만 여기서는 모두 삼국지에서 유비의 근거지였던 형주에 있는 고을 이름이다.
사마천이 귤나무 1000그루면 제후가 부럽지 않다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살았던 기원전 1세기 무렵에도 귤은 엄청 비쌌던 모양이다. 하지만 귤나무를 심어 부자가 되는 것도 때를 잘 만나야 한다. 시절을 잘못 만나면 후손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고사하고 이리저리 빼앗겨 신세만 고달파질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귤이 대학나무가 아니라 ‘원수나무’였던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귀한 만큼 수탈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성종실록’ 20년의 기록에 제주도 농민이 귤나무를 심기는커녕 잘 자라고 있는 나무조차 몰래 뽑아 죽이는 경우가 있다는 장계가 올라왔다. 그러자 성종이 귤나무를 심으면 피해만 크고 이익은 없어서 그런 것이니 귤나무를 심는 자에게 상을 주면 즐겨 나무를 심을 것이라며 포상방안을 의논해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도대체 귤이 얼마나 귀하기에 수탈의 대상이 돼서 원수나무라는 소리를 들었을까 싶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귤은 함부로 먹는 과일이 아니었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조차 어쩌다 1년에 한두 번 맛볼 수 있는 값비싼 과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귤이 더욱 소중해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귤 재배가 가능했던 곳인 제주도에서 귤이 올라온 것을 기념해 과거시험을 실시할 정도였다. 19세기 중반인 조선후기의 풍속을 기록한 책이 ‘동국세시기’인데 여기에 제주도에서 귤과 유자를 진상하면 임금은 과일을 종묘에 바쳐 제사를 지낸 후 가까운 신하들에게 하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면서 옛날부터 탐라 성주가 귤을 바치면 이것을 기념하고 치하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본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귤이 도착한 것을 기념해 실시하는 과거가 황감제(黃柑製)로, 여기서 급제를 한 선비가 여럿이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다산 정약용이다. 그리고 시험에 참여한 선비들에게는 등수에 관계없이 귤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올 한 해도 이제 다 저물어가고 있으니 귤을 먹으며 내년을 설계하고 준비하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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