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들이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육필 시집이 나왔다. 정현종 신경림 이하석 오탁번 윤후명 강은교 등 시인 43명이 자신의 대표 시를 직접 고르고 써서 펴낸 ‘시인이 시를 쓰다’(지식을 만드는 지식). 정성스레 써내려간 육필 원고에는 시인마다의 개성이 가득하다. 시어들은 한층 생기 있고 풍성해졌다. 시인들은 이번 ‘대표 시 모음집’ 외에도 각자 별도의 육필 시집을 차례로 펴낸다.
대개 컴퓨터 화면의 커서 끝에서 시어들이 탄생하는 세상이기에 이번 육필 시집은 시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이하석 시인은 “육필이란 몸과 이어진, 또 다른 제 힘의 한 모습”이라고 정의했다. 나태주 시인은 “육필 시집은 한 시인에 대한 철저한 기념물이다. 아뜩한 환희요, 행운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쓰는 육필 원고에 대한 감회도 새로웠다. 이정록 시인의 감회는 한 편의 시 같다. “컴퓨터로 시를 찍다가, 오랜만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시를 옮겨보았다. 가운데 손가락 끝, 펜 혹이 부풀어 올랐다. 작가는 펜 혹으로, 구부려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씻거늘, 그간 손가락이 물러진 것이다.” 정일근 시인은 육필 작업의 고통을 토로했다. “유리 펜도 닳고 잉크도 줄어들고 손끝을 타고 내 정신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버린 것 같다.”
육필 예찬론자인 김형영 시인은 평소에도 아무 백지에나 가리지 않고 시를 적는다. “컴퓨터 화면에서 한 번 삭제하고 나면 삭제된 구절을 되살리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러나 백지에 쓴 것은 지워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 언제든지 처음 쓴 구절을 다시 볼 수 있다. 지웠던 구절이 더 나아보였을 때는 잃었던 아들을 찾은 성경 속의 아버지의 마음과 비기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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