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엘리어트’(2000년) 중에서 》 20대 때. 모처럼 정장을 차려입은 날이면 배트맨 슈트를 걸친 양 자신만만했다. 무지하여 용감했음을 알아차린 건 서른이 지나서였다. 재킷은 터무니없이 컸고 바지는 우스꽝스럽게 길었다. 마흔이 지나면 지금의 옷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할지. 착각으로부터의 해방은 늘 잔인하게 뒤늦다.
어쨌거나 20대 중반의 2월이었다. 쌀가마니마냥 벙벙한 재킷을 자랑스럽게 뒤집어쓴 채, 지금은 없어진 종로 어귀 극장에 앉았다. 팔에는 엄청난 부피의 꽃다발을 하나씩 끌어안고. 둘이서 나란히.
생각해보면 2편 이후의 록키 시리즈처럼 2시간여의 행로가 뻔뻔하게 빤한 이야기였다. 복싱 헤드기어를 쓴 채 발레에 반해버린, 발그레한 볼과 얇고 창백한 입술을 가진 소년. 성질머리를 애써 과장하는 선한 눈매의 아버지가 결국 헌신적 지지자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 못한 관객이 있을까. 느닷없이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비현실적 형제애가 뜨악하고 불편했지만, 뭐 영화니까. 밍밍한 스토리를 커버하는 이음매 없는 편집과 영리한 음악이 없었다면 옆자리 꽃다발의 동태만 내내 힐끔거렸을 거다.
빌리의 어머니가 왜 어떻게 언제 돌아가셨더라. 희미하다.
선명한 것은 문득 귀에 박힌, 임종을 앞둔 그 여인의 뜬금없는 타이름이었다.
“언제나 너 자신으로서 살아가렴(Always be yourself).”
죽음을 앞둔 자는 그 말이 착하니 귀담아 들을 만하다 했다. 물론 영화일 뿐이지만. 가고 싶은 길과 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조숙한 고민으로 갈팡질팡하는 어린 아들이 안쓰러웠던 걸까. 아니면 평생 자신으로서 살아보지 못한 채 종영을 맞이한 생애가 문득 한스러워 마침 눈앞에 앉은 아들에게 어둡고 무거운 한탄을 남겨버린 걸까.
열 번의 2월을 다시 넘기는 동안 내가 나 자신으로서 살아낸 시간은 얼마나 될까. 미션 임파서블. 멋지고 감동적인 문장은 입에 담거나 귀에 걸기에 행복하지만 몸으로 행하기는 한없이 무겁다. 때로는 고통스럽다.
나답게. 나로서. 내가 되는 것. 나는 이미 나인데 내가 되려면 끝없이 발버둥쳐야 한다. 열한 살의 빌리에게 어머니는 얼마나 엄청난 말씀을 남기고 떠나신 건지.
1990년대 한국 TV드라마의 클리셰 “나다운 게 뭔데.” 나답다는 건, 나로서 산다는 건 정말 뭘까.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의 나. 나이 들수록 어렵고 버겁다.
미처 그런 고민 따위 붙들고 앉아 있을 겨를 따위 없었던 기억이, 어쩌면 막연한 임시방편 답이라도 되지 않을지. 나에 대해 생각할 짬이 도무지 없었던, 무언가에 몰입하느라 나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간. 나를 잊은, 내가 없었던, 내가 나였던 시간.
빌리의 발레학교 합격 에피소드가 가진 설득력은 온전히 제이미 벨의 표정에 의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멍하니 음악에 흡수된 육체가 지을 법한 표정. 심사위원들이 그 짤막한 접점을 눈치 챈 것이라면, 무리가 없다.
내가 내게 묻는다. 남을 배려하는 것과 남의 눈치를 살피는 것의 차이는 뭔가. 명료하게 구분해 살고 있는가. 나였던 나라서 그리운 나는, 옆자리 꽃향기와 빌리의 춤과 티렉스의 노래를 뒤죽박죽 교차시켜 기억하는, 헐렁한 정장 따위 신경 쓸 틈 없던 시간에도 존재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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