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읽기에 불편하다. 대화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행갈이도 문단 나눔도 헐겁지 않다. 촘촘하고 빼곡하다. 마치 밥공기에 꾹꾹 힘주어 눌러 담은, 단단해진 밥을 힘겹게 떠먹는 듯하다. 좀체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내용도 불편하다. 1980년대 후반 서른 즈음이 된 남자와 스물예닐곱의 여자가 데이트를 앞두고 있다. 한 남자, 한 여자로만 칭해진 이들. 이미 서너 번 만난 사이. 설렘도 기대도 없다. 상대방에 대한 확신도 없지만 그렇다고 바로 돌아서기에는 왠지 찜찜하고 아쉬운 속내들. 여자는 ‘운명의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기대감을 버리기 어렵고, 남자는 집에서 혼자 맥주 마시며 포르노 잡지나 뒤적거리는 것보다는 그냥 여자(꼭 이 여자가 아니라도)를 만나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이들의 만남은 야구장, 카페, 러브호텔, 술집 등을 거치며 불규칙적으로 반복된다. 그렇다고 이들이 단순히 섹스 대상자를 찾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진지하고 행복한 결혼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무미건조하고, 일견 반복되는 듯한 이들의 모습을 작가는 지긋지긋하게 현실적으로, 차분히 묘사한다.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니들이 꿈꾸는 백마 탄 왕자 같은 신랑감이나 미스코리아 외모 뺨치는 아내감은 없다’고. 결국 자신의 상대는 지금 자신 앞에 있는 ‘평범한 이성’일 뿐이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행복하지만 짧으며, 결혼생활은 우울하고 길게 이어진다. 주말에는 같은 색 옷을 맞춰 입고 도시 외곽의 아웃렛과 가구점을 훑는다. 연립주택 반지하의 방 두 개짜리 신혼집은 점점 협소해진다. 이들은 장대한 계획을 세운다. ‘내 집 마련 5개년 계획.’ 하부 계획은 이렇다. 외식 금지, 조기 귀가, 물건 구입 금지, 불필요한 카드 해약, 절대 피임, 경조사 절제…. 하지만 줄이고 줄여도 계획했던 것만큼 돈은 불지 않는다.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생활은 늪으로 빠진다.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결혼하게 됐고, 살다 보니 삶이 점점 팍팍해지더라는 것이 소설 속만의 얘기일까. 그러나 작품의 매력은 이런 익숙한 일생을 입이 바짝 마를 듯한 건조한 문체로, 그것도 놀랍도록 세밀하게 짚어 나가는 데 있다. 이런 까닭에 독자는 인식도 못하고 넘긴 자기 삶의 일기장을 다시 펼치는 듯한 느낌이 들지 모른다.
작품은 후반 남녀의 ‘불미스러운’ 사고와 남겨진 아들이 벨기에에 입양된 뒤 다시 한국에 찾아오는 것으로 변주를 준다. 내내 답답하고 불편했던 독자의 호흡에 숨통이 트이는 것도 이때다. 하지만 무언가 꽉 막힌 듯한 불편한 상태로 끝냈으면 어땠을까. 그것이 되레 우리의 탈출할 수 없는 현실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가 8년 만에 펴낸 장편이다. 작가는 전북 무주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품을 썼다고 했다. 황혼이 시작되기 전 빛의 축제에서, 그 빛이 어둠에 스러지기까지의 황혼 속에서 주로 집필했다고. 작품은 아름다운 황혼의 초입보다는 어스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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