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열리고 사흘째에는 서설(瑞雪)이 내렸지요. 북한산 자락 밑에 사는 제 집의 창 너머 숲에도 눈이 내렸습니다. 고운 체로 치듯이 부드럽게 흩날리는 눈발이었지만, 소나무 가지와 나목의 우듬지에도 어느새 곱게 내려앉았습니다. 제가 간혹 산책을 나가는 집 뒤의 둘레길도 햇솜처럼 희고 폭신한 길이 되었겠지요. 아무도 가지 않은 순백의 눈길은 설레다 못해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 살짝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 길은 마치 새해가 되어 받아든, 아직 아무 그림도 그리지 않은 흰 도화지 같아요. 아직 그림을 망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무언가를 새로 그릴 수 있다는, 열려 있는 가능성과 희망에 도전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여기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청정한 겨울 산속에 눈 쌓인 오르막길이 나있습니다. 하늘과 맞닿은 오르막길의 정상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요.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오르막이 있으니 내리막이 있을까요. 아니면 낭떠러지일까요. 참 궁금하죠?
세상에는 길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또한 모두 타고난 인생길이 있고요.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그 궤적이 바로 인생길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이렇게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산속의 눈길을 혼자 헤쳐 나가야만 하는 저마다의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릅니다.
어제 저는 영화를 보러 갔다가 상영시간까지 기다리기가 무료해서 백화점 한쪽에 ‘자리를 깐’ 이에게 1만 원짜리 신수점을 보았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님 말고. 그래도 슬쩍 새해 제 인생길이 궁금했기 때문이었지요.
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히말라야의 설산이 생각나는군요. 지난해 말, 만년설이 덮인 안나푸르나에서 새로운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다 실종된 세 사람의 산사나이가 떠오릅니다. 박영석 대장은 등정주의가 아닌 등로주의를 택했습니다. 정상에 빨리 오르는 것보다 아무도 올라가지 않은 길에 도전하고 개척하는 데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 발씩 떼며 길 위에서 용기와 희망을 가졌을 그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사람들은 정상을 향해서만 달리려 하지요. 그러나 정상에 서면 곧 내려와야 합니다. 사고는 하산할 때 주로 생긴다고 합니다. 박 대장은 생전에 겸손한 인터뷰를 했지요.
“히말라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몇 가닥뿐입니다. 신(神)이 허락해주는 시간에만 우리는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는 거죠.”
박 대장이라고 도처에 죽음이 도사린 자신들의 길을 몰랐겠습니까? 가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박 대장과 대원들이 그리 불행하지만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죽음으로써 이미 남들이 영원히 가지 못할 그들의 길을 개척했고, 그 용기는 사람들의 인생에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열어줄 테니까요. 우리들의 인생길 또한 우리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고 도전하는 것이며, 인생길에도 무수한 크레바스가 숨겨져 있지만 그 과정을 극복하고 즐기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그것도 신이 허락해주는 시간에만.
그들이 잠든 안나푸르나에도 어쩌면 눈이 내리고 있겠지요. 불꽃같은 생의 열정으로 살다간 그들의 정신이 설화로 피어나고 있을 겁니다. 고은 시인의 ‘눈길’이란 시로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며, 새해 새로 펼쳐질 우리들의 인생길에도 설렘과 평화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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