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아내는 떠나고 없다. 2년 전 모든 희망을 송두리째 묻어버렸다.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집을 떠나지 못한다. 아내의 그림자가 아내의 숨결소리가 너무나 짙게 깔려 있다. (중략) 나는 이 집에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언제까지나 아내와 내가 함께 머무를 아내의 집이니까.’(이용태, ‘아내의 집’ 중에서)
올해 팔순인 이용태 씨는 여전히 아내가 그립다. 언제까지나 함께하리라 믿었던 아내는 2009년 봄 갑작스레 그의 곁을 떠났다. 담관암 발병 6개월 만이었다. 그는 삶의 의욕마저 통째로 잃어버렸다. 30여 년을 키워온 화물운수회사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그저 아내와 살던 집에서 아내의 흔적을 보듬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랬던 그에게 요즘 새로운 활력소가 생겼다. 글이다. ‘시민기자’라는 직함으로 지역신문에 기고를 하고 인터넷으로도 지역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이따금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도 쓴다. 아내가 떠난 그에게 원고지라는 새로운 동반자가 생긴 셈이다.
○ 아내가 떠나고 난 뒤…
경기 군포시 산본동에 있는 이 씨 집을 찾은 것은 10일 오전. 현관에 들어서자 오른편 서재 벽면을 가득 채운 중절모 수십 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아마 이마저도 없었다면 누구도 집주인의 나이를 쉽게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은 80대 할아버지가 홀로 살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사도우미가 살림을 돕고 두 딸과 작은 며느리가 번갈아가며 집에 들른다고 했다. 그러나 집은 치워서 깨끗한 게 아닌, 원래가 정갈한 느낌이었다.
그는 안방만큼은 누구에게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내가 쓰던 물건, 아내의 체취, 그리고 50년을 함께 산 부부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아주 가끔 안방에서 잠을 청할 뿐이다. 아내의 흔적을 최대한 지키려는 그만의 방식이다. 이런 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예의라고 그는 믿고 있다. 또 그래야만 아내를 떠나보낸 그가 덜 외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긴다.
“자식들도 아직까지는 제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라는 얘길 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제 마음을 다 이해해서겠죠.”
이 씨에게 지금 살고 있는 산본은 특별한 곳이다. 충남 청양 태생인 그는 1958년 결혼 후 1970년대 초까지 보령과 대전 등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사업을 하기 위해 상경한 후에는 서울 혜화동에서 20여 년을 살았다. 산본과는 어떤 인연도 없었다. 산본으로 온 것은 그저 한옥을 떠나 아파트에 살고 싶다던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부부는 1990년대 초 1기 신도시(분당, 평촌, 산본, 중동, 일산)에 차례로 분양을 신청했다. 그러다 산본의 아파트가 당첨됐던 것이다. 아내는 뛸 듯이 기뻐했다.
1994년 이사한 새 아파트에 그는 좀체 정을 붙이지 못했다. 서울로 출퇴근하다 보니 산본에는 아는 사람은 물론이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었다. 몇 해 전에는 서울로 다시 이사하려고 집을 팔았다가 아내가 끝내 떠나지 말자고 하는 바람에 판 집을 손해를 보고 되사는 해프닝도 있었다. 아이러니지만 그는 아내가 떠난 후에야 진정한 산본 사람이 됐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아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곳이 아닌가. 산본은 아내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그는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 글쓰기로 달래는 상실감
아내의 빈자리는 잦아들기는커녕 날로 커져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내만 생각한들 먼 길을 떠난 아내가 다시 돌아올 리 없었다. 외로움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지역 문예창작모임인 ‘수리샘 문학회’를 알게 됐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던 그에게 글쓰기는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문학을 향한 회원들의 열정은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었고, 가족 같은 분위기는 외로움에 지친 그를 따뜻하게 감싸줬다. 마음은 안정을 찾아갔고, 아내를 그리워하는 아픔은 점차 애틋함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12월 발간된 문학회의 11번째 동인지에는 수필 ‘숲따라 꽃따라 마음따라 걷는 길’과 함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인 ‘영산홍 필 때 다시 만나요’라는 글을 실었다.
이 씨는 지난해 3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지방자치단체 지원을 받아 노인일자리사업을 시행하는 ‘군포시니어클럽’에서 시니어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 1년 계약으로 일을 시작한 동료 5명 중 최고령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기자단 카페(cafe.daum.net/dreamtlsldj)에 기사를 올리고 월 20만 원 정도를 받는다. 처음에는 ‘내가 쓴 글을 누가 보기나 할까’ ‘누가 내 글을 비웃지나 않을까’라는 생각에 쓰고도 올리지 못한 적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시니어클럽 측만 좋다면 1년이고 2년이고 더 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6개월 전부터는 지역 주간지인 군포신문에도 한 달에 2, 3차례 기고문을 보낸다. 지난해 10월에는 독도를 직접 다녀와 ‘독도는 우리 땅, 독도야 사랑해!’라는 기사를 썼다. 가장 최근에는 ‘다가올 인생 100세 시대를 생각한다’라는 기사가 1월 5일자에 실렸다. 그는 시니어클럽에서 받는 월급과 군포신문 원고료를 꼬박꼬박 모아두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형편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고 싶어서다. 그는 “최근 통장을 보니 올 설에는 몇 집에 쌀가마니 정도는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이 씨는 모든 기사의 초고를 우선 200자 원고지에 연필로 쓴다. 그러고는 데스크톱 컴퓨터에 앉아 ‘독수리 타법’으로 2∼3시간 꼼꼼히 타이핑한다. 완성된 원고는 e메일로 신문사에 보낸다. 사진도 아들이 사준 디지털카메라로 직접 찍는다. 잘 나온 사진을 골라 e메일로 보내는 것이 이젠 믹스커피를 타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일하라, 베풀라, 배워라. 이 세 가지는 제가 저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과도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실천하고 있는 거지요.”
푸른 줄이 그어진 200자 원고지와 깨끗하게 깎아둔 연필. 그는 오늘도 낮은 탁자에 앉아 새로운 인생을 써내려간다.
‘지금의 이런 내 모습을 아내가 본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다.’(이용태, ‘떠날 수 없는 곳, 산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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