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 시간 - 꿈… 보자기에 한 땀 한 땀 수를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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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7일 03시 00분


■ 자수 명장 김현희 씨 롯데 갤러리서 전시회

보자기를 통해 전통의 재현과 변형을 시도한 김현희 명장. 그는 “솜씨가 사인”이라며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는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보자기를 통해 전통의 재현과 변형을 시도한 김현희 명장. 그는 “솜씨가 사인”이라며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는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가방은 자기 시스템에 맞는 것만을 수용한다. 그러나 보자기는 반대로 어떤 형태, 어떤 시스템이라도 거기에 적응하여 받아들인다. 보자기는 둥근 것도 싸고, 네모난 것도 싼다. 긴 것, 짧은 것,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등 싸는 물건에 따라서 보따리의 형태도 달라진다.” 평론가 이어령 씨는 보자기를 서구와 한국을 상징하는 ‘문화기호’로 해석했다. 가방뿐 아니라 돗자리로, 가리개로 수시로 변신 가능한 보자기는 기능도 탁월하지만 미적으로도 독보적 매력을 품고 있다.

새해를 맞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갤러리(롯데백화점 12층)에서 29일까지 마련한 자수명장 김현희 씨(66)의 ‘복을 수놓다’전은 보자기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만나는 자리다. 전통을 재현하고 이를 새로운 시도와 방법으로 재창조한 작품이 어우러져 한국 자수와 보자기의 문화 예술적 가치를 확인하게 한다.

다양한 수를 놓은 수보, 다른 크기의 천을 이어 만든 조각보로 구성된 전시는 옛 여인의 멋과 시름이 담긴 보자기가 어떻게 현대적 미감을 표현하는 매체로 진화가능한지를 묻고 답한다.

○ 수를 놓다

전시에선 복주머니, 수저집, 흉배 등 초기 작품부터 현대 추상화처럼 보이는 보자기 등 50여 점을 볼 수 있다. 김 명장이 옛 여인의 솜씨를 다듬어낸 전통 보자기에선 고운 색감, 단순하고 해학적 문양이 조화를 이룬다. 그 뜻을 이은 창작 보자기에선 세련된 색감과 현대적인 디자인의 조화가 돋보인다. 특히 한 땀 한 땀 수실로 채운 색면의 감각적 분할, 자투리 천을 이어 생겨난 선과 구성의 미학이 융합된 작품은 동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생활공예와 현대적 추상회화의 만남이 나아갈 방향을 제안한다.

고관절을 다쳐 불편한 몸으로 전시장을 지키는 김 씨는 단 한 땀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전 작품을 손수 바느질했다. 그는 궁중 수방(繡房)나인에게 가르침을 받은 윤정식 선생을 사사했고 1986년부터 보자기에 매달려 왔다. 국내외에 한국 보자기의 미학을 알리는 데 앞장선 그의 작업은 해외에서 더 주목받는다. 시애틀박물관과 하버드대박물관, 빈민속박물관이 작품을 소장했고 그의 ‘보자기’ 작품집은 일본에서 1만 부가 팔렸다.

○ 복을 짓다

김현희 명장의 수보와 조각보 작품들.
김현희 명장의 수보와 조각보 작품들.
의식주 생활에 사용된 우리의 전통 자수는 중국 일본과 달리 실을 꼬아 수를 놓는 것이 특징. 혼례 등 행사에 쓰인 수보 문양으론 나무와 꽃이 많고 상서로운 동물도 자주 등장한다. 전시장에선 아기 손톱보다 작은 나비와 새가 등장한 소품부터 전통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가능한 대담한 추상 조각보까지 보는 재미를 준다.

보자기에 일생을 바친 김 씨는 “옛 조각보를 보노라면 조각 하나하나가 여인들의 솜씨뿐 아니라 삶을 담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며 “그간 어려움을 겪고도 나를 설 수 있게 한 것도 자수다. 이건 내 생명줄”이라고 말한다. 보자기를 완성할 때마다 삶의 기억과 시간, 꿈을 보듬어주는 보자기가 탄생하는 셈이다.

자투리 천과 낡은 옷을 재활용해 만들었던 조각보.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작업에서도 자기 표현의 길을 찾아낸 여인들의 솜씨를 다시 오늘에 불러낸 명장. 그의 보자기는 전통 자수의 깊은 맛, 현대의 미감이 서로 통섭하고 상생하는 살아있는 문화현장이었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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