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1주기를 앞두고 나온 소설집. 생전에 문예지에 발표했지만 소설집으로 묶이지 못했던 단편 3개에 문인들이 추천한 단편 3개를 더해 ‘추모 소설집’ 형식으로 출간됐다.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일기장만을 남겼을 뿐 미발표 작품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까닭에 고인이 남기고 간 ‘마지막 소설집’이란 이름으로 출간됐다. 아쉽고도 고마운 느낌이다.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자전적 단편이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작가가 가슴속 응어리진 한(恨)을 담담히 풀어놓은 수기와 같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농촌에서 살며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상경한 뒤 펼쳐진 서울의 낯선 생활, 무난했던 결혼생활과, 또한 무던했던 작가생활…. 하지만 깊은 시련이 찾아온다. 1988년 남편을 잃고, 다시 석 달 만에 아들을 떠나보낸 것.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도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아들을 잃은 어미의 원초적인 절망은 짐승의 절규와도 같다. 이 작품은 2010년 현대문학 2월호에 발표됐다. 20년이 넘게 흘렀어도 작가의 아픔이 어제 겪은 일처럼 생생하게 드러난다.
단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날카로운 세태 풍자를 통해 저절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작품. 한 중년 여성이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임한 능력 있는 시어머니의 재력 앞에 할 수 없이 파출부 역할을 하고, 다시 도도하고 싸가지 없는 전 며느리를 만나는 불편한 하루가 생생하게 묘사된다. 다른 단편 ‘빨갱이 바이러스’에서는 수해를 입은 한 마을에 우연히 모인 네 여성이 하룻밤을 보내며 자신들의 숨겨진 얘기들을 털어놓는다. 사람들마다 숨기고 있는 욕망이나 상처가 하나씩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생의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은 여전히 날이 서 있다. 순박한 듯하면서도 곳곳에 일탈을 꿈꾸는 인물들의 모습은, 오남매를 키우며 바쁘게 살았던 작가 본인의 욕망을 대리하는 듯하다. 그러기에 고인이 더 친근하고 솔직하게 다가온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단편 ‘카메라와 워커’(1975년 발표), 소설가 김애란은 ‘닮은 방들’(1974년 발표)을 추천했다. 소설가 신경숙이 단편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3년 발표)에 덧붙인 짧은 글에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다.
“어느 날 새벽에 책장을 뒤적이다가 당신이 주신 세뱃돈을 찾아냈네요. 그리고 또 어느 날인가는 아주 오래전, 십오 년도 더 전에 당신이 제게 ’신경숙 씨, 보셔요’라는 제목으로 쓰셨던 글을 발견했습니다.(…) 아주 늦어버린 답장이네요. (선생님) 안녕히,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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