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극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관념의 역사(力士)’가 돌아왔다. 2008년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서른 나이에 4시간 반짜리 장대한 서사극 ‘원전유서’로 동아연극상 대상과 희곡상을 거머쥔 극작가 김지훈 씨가 상연 시간 4시간에 육박하는 대작으로 다시 찾아왔다. 18일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에서 개막한 ‘풍찬노숙’(연출 김재엽)이다.
연극의 표면적 서사는 한반도로 이주한 다문화가정 출신의 영웅호걸이 한국사회의 차별에 맞서는 혁명의 수장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판 홍길동전이라고 할까. 하지만 정작 3시간 40분짜리 연극은 그런 표면적 서사 따위엔 관심이 없다.
무릇 홍길동이라 하면 불합리한 신분질서에 대한 시퍼런 비판의식의 날이 서 있어야 하는 법. 하지만 ‘풍찬노숙’은 바람으로 끼니를 때우고 이슬을 베고 잔다는 한자숙어 제목과 ‘순대 빛깔 민족’이란 함축적 표현으로 대부분 이를 대체한다.
극은 그보다는 오히려 순대 빛깔 민족이란 ‘새로운 민족 만들기’의 핏빛 이면을 풍자하는 데 주력한다. 즉, 다문화가정 판 홍길동이라 할 응보(윤정섭)를 통한 사회적 불평등 비판보다는 그를 앞세워 새로운 민족 혁명 신화를 조작하려는 ‘킹 메이커’ 문계(이원재)로 대표되는 반체제적 지식인 일반에 대한 비판이 더 뚜렷하다.
이 때문에 이 연극에서 장대한 서사시를 기대한다면 실망만 안게 되기 십상이다. 그보다는 비록 길고 묵중하더라도 혁명이나 민족이란 대의(大義)의 허구성 내지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기지 넘치는 장면 장면의 콩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응보의 영웅적 풍모를 들려주는 순대 빛깔 민족의 아낙 요년(황석정)과 조년(김효숙)이 풀어내는 ‘상장 설화’가 대표적이다. 과거 영웅담 주인공은 무공이 탁월한 경우가 많았다. 21세기형 영웅이라 할 응보의 경우엔 ‘공부의 신’이라 할 만큼 머리가 좋다는 과장된 전설이 전해진다.
그에 따르면 응보의 어미 정갑(고수희)은 응보가 탄 상장을 땔감으로 밥을 짓고 구들장 지피고 목욕물을 끓였으며 시간이 남으면 자그마치 400가마에 이르는 트로피를 부수어 자갈 대신 마당에 깔고 살았다고 한다. 그도 부족해 응보가 받은 상장을 넣고 달인 물을 마시면 일자무식도 순식간에 우등생이 된다는 소문에 그 집 앞에 장사진을 쳤고 주변 천재들이 모두 그 덕을 봤다는 식이다.
갓난아기들을 북 속에 넣고 북을 쳐 머리를 으깨는 소리를 들려줌으로써 북소리로 대표되는 집단적 호출에 복종하도록 각인시킨다는 문계의 입담 또한 한국의 전통적 영웅설화인 아기장수 설화 이면에 숨은 폭력성에 대한 고발이자 풍자다.
오늘날 ‘홍길동’이 익명의 존재를 대표하게 된 것은 제2의 홍길동이 출현했을 때 그 존재의 혁명성과 희소성을 문학성과 대중성으로 희석시키기 위한 기득권 세력의 무의식의 발로요 음모라는 응보의 장광설도 그런 지적유희의 산물이다.
형식과 내용에서 이런 표면과 이면을 엇갈려 놓은 유희야말로 이 작품의 숨은 매력이다. 이는 무대와 객석의 위치를 뒤바꾼 무대디자인(정승호)을 통해 극대화된다. 관객은 무대에 앉고 배우들은 정면의 200여 개 객석에 가설된 무대를 중심으로 극장 도처에서 등퇴장하며 관객의 의표를 찌른다. 이를 위해 최대 420개 객석을 190여 석으로 줄였다.
못내 아쉬움도 있다. 쓰레기 매립지를 무대로 했던 ‘원전유서’에서는 빈부격차라는 사회적 비판의식과 보편적 인간구원이란 신화적 주제가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하지만 ‘풍찬노숙’의 경우엔 이론에 역사를 꿰맞추려는 인간의 지적 오만에 대한 통시대적 비판이 이민족 차별이라는 한국사회의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압도한다. 또한 단일 극단(연희단거리패) 배우들로 채워진 ‘원전유서’의 경우 말과 몸의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있었는데 여러 극단 배우들로 연합군을 구성한 ‘풍찬노숙’에선 그런 긴장감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꾸준한 공연을 통해 연출가와 배우들이 풀어가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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