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배는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는 과일인 만큼 먼 옛날부터 이 땅에서 자란 토종과일 같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배는 토종이고 사과는 17세기 초에 전해진 외래종이다. 물론 배 역시 품종이 많이 개량됐으니 옛날 배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배를 재배한 역사는 오래됐다. 삼국사기에 서기 546년 고구려 양원왕 때 두 그루의 배나무 가지가 이어지는 연리지 현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삼국유사에도 8세기 통일신라 혜공왕 때 재상인 각간의 집 배나무에 수많은 참새가 날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집에서 배나무를 키웠다는 이야기다.
옛날 사람들은 배에 환상을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신들이 사는 곳에서 자라는 과일로 여겼다. 기원전 2세기 동방삭이 썼다는 신이경(神異經)에 동방에 키가 100장(丈)이고 둘레는 6∼7척(尺)인 나무가 자란다고 했다. 지금 도량형으로 바꾸면 높이가 300m, 둘레가 2m에 이르는데 나무 이름이 이(梨)라고 했다. 열매는 지름이 3척으로 속이 하얀 것이 먹으면 신선이 된다고 적었다. 작자 미상의 한무내전(漢武內傳)이라는 문헌에도 배는 하늘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약이라고 했다.
맛있는 배를 먹으며 약이 된다고 생각했고 신선이 된 기분이었던 것 같다. 실제 배를 뜻하는 한자인 이(梨)도 몸에 이롭다는 뜻에서 생긴 글자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수광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뜻풀이를 해놓았다.
배는 먹으면 가슴, 그러니까 폐에 이롭기 때문에 이롭다는 이(利)자를 따라서 생긴 이름이고, 감(柑)은 맛이 달기 때문에 달다는 뜻의 감(甘)자를 따라서 지은 이름이며, 대추 조(棗)는 나무에 가시가 많아 찌르기 때문에 가시 극(棘)자를 따와서 만들어진 글자라고 했다.
이수광은 배가 가슴이 아플 때 먹으면 좋은 과일이라고 적었는데 ‘동의보감’에도 배는 가슴이 답답한 것을 멎게 하고 풍열과 가슴 속에 뭉친 열을 없애 준다고 적혀 있다.
옛사람들이 배를 묘사한 글을 보면 사실 병이 나을 만도 했다. 그중 유명한 배로 함소리(含消梨)가 있다. 얼마나 향기롭고 물이 많은지 한 입 깨물면 입안에서 파도가 친다는 배다.
조선 전기의 문인 서거정이 얼마나 맛있는지 시로 읊었다. “향기로운 배 살지고 부드러운 것이 함소리로다/올해 한양 시장의 배 값이 비싸지만/귀하기도 하여라. 친구가 자주 보내주는데/한 입 씹으니 혀 밑에 파도가 이는 걸 알겠다.”
이 함소리는 전설적인 배로 무게가 10근이나 되는데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전부 물이 되어 사라진다.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도 향기로운 즙이 넘치며 능히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배라고 소개됐을 정도다.
또 맛있는 배로는 교리(交梨)가 있다. 보통 신선이 먹는 배라고 하는데 조선 중기의 시인 이응희는 옥담시집(玉譚詩集)에서 “깨물어 먹으면 눈을 입에 머금은 듯하고 삼키면 서리를 먹는 것 같다”면서 “속세의 번뇌가 사라지니 굳이 신선의 음료를 마실 필요가 없다”고 읊었다.
지금 배는 품종이 개량되어 옛날 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많고 향긋하다. 그러니 옛날 문인들이 요즘 배를 먹어 보면 어떻게 묘사를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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