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누군가로부터 ‘건네받은’ 것처럼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글을 쓰면서 떨칠 수 없었던 건 ‘저기’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바를 내가 그저 ‘필사’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글은 결코 내 노력만으로 ‘창작’해낸 작품이 아니다.”(존 로널드 톨킨, ‘니글의 이파리’ 중)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은 자신의 이성과 역량만으로 작품을 쓴 게 아님을 여러 차례 밝혔다. ‘알 수 없는 힘’이 창조의 원천이었다는 것.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과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니 모리슨도 내면에서 솟아오른 미지의 힘 덕분에 작업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융은 이런 미지의 힘을 ‘집단(원형) 무의식’이라고 명명했다.
융은 스승인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의 토대를 다진 인물.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의 정신세계가 성적 본능과 어린 시절의 경험에 종속된다는 스승의 ‘개인 무의식’ 이론에 의문을 표했다. 그보다는 인류가 시작될 때부터 존재해온 ‘집단 무의식’, 즉 100만 살(歲) 된 영혼이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지혜의 보고이자 영감의 원천이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이라고 봤다. 집단 무의식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신화다.
심리치료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저자는 책에서 융의 심리학, 즉 집단 무의식을 토대로 현대인의 의식 구조를 파헤쳐 간다. 예를 들어 “해몽은 인류가 유사한 꿈의 패턴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누구나 절벽에서 떨어진다거나 멈추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귀신에 쫓기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전쟁이나 자연 재앙을 앞두고 이를 예언하는 꿈을 꾸는 사람들도 많다. 융에 따르면 이는 예지력 때문이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네트워크에 접속한 결과다.
융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1913년 10월 융은 시신더미가 홍수처럼 유럽 전역을 뒤덮는 환영을 봤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아홉 달 전이다. 2주 후엔 “똑똑히 봐라. 이건 모두 사실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환청도 들었다. 융은 환영과 환청에서 영감을 얻어 ‘망자를 위한 일곱 편의 설교문’을 완성했다. 이 경험은 그가 집단 무의식에 천착하는 계기가 됐다. 저자는 사람들의 이 같은 경험을 망상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100만 살 된 영혼’과의 조우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집단 무의식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개인적인 딜레마에 봉착할 때 집단 무의식이 해결책을 내어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때로는 너무 분석만 하지 말고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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