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陳相(진상)은 등나라에서 정전법을 시행하여 성인의 정치를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 陳辛(진신)과 함께 왔다. 하지만 그는 농가류의 허행을 보고는 이제까지 공부한 유학의 설을 모두 버리고 허행에게 배웠다. 그리고 맹자를 만나 허행의 말을 전하여, 등나라 문공은 진정한 성인의 정치가 무엇인지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진상은 허행의 정치론을 설명했다. 허행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없이 모두가 함께 노동을 하는 평균적인 평등주의를 주장했다.
與民竝耕而食은 백성들과 함께 나란히 밭을 갈아 그 소출로 밥을 해 먹는 것을 말한다. 饔…而治는 아침밥과 저녁밥을 손수 지어 먹으면서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饔은 朝飯(조반)이고 …은 夕飯(석반)인데, 동사로 전성시켰다. 倉(늠,름)은 곡물을 넣어 두는 창고, 府庫는 財貨(재화)를 보관하는 창고이다. (려,여)民은 백성에게서 세금 따위를 걷어 백성을 괴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自養은 군주가 스스로를 사치스럽게 기른다는 뜻이다. 惡得賢은 ‘어찌 어질 수가 있겠습니까’로, 惡는 의문사다.
유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허행의 정치론은 상하 계층의 직분과 공능을 무시하여 비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군주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백성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점에는 공감했다.
북송의 徽宗(휘종)은 취미와 도교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다가 결국 금나라의 포로가 돼 만주에서 죽은 망국의 황제다. 그는 道君皇帝(도군황제)라고 자칭했으며, 河南(하남·허난) 성 開封(개봉·가이펑)에 萬歲山(만세산)을 만들었다. 艮(간, 북동) 방향의 산이라고 해서 艮嶽(간악)이라고도 부른다. 선조 때 金誠一(김성일)은 ‘艮嶽賦(간악부)’를 지어 도군황제의 (려,여)民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나라 고지도에서 渭源(위원) 북쪽 만주에 皇帝陵(황제릉)으로 표기한 곳이 곧 휘종의 무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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