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① 민병우 씨(30)는 영화감독이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는 지금까지 단편영화 8편을 만들었다. 영화에 따라 정부나 민간의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제작비 대부분은 자신이 부담했다. 그는 상업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거나 영화제 출품에서 받은 상금 등으로 제작비를 마련한다. 소수 인원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연출뿐 아니라 각본, 촬영, 편집 등까지 직접 해결한다. 현재는 자신을 포함한 스태프 4명과 스마트폰으로 찍는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예상 제작비는 1000만 원. 그는 이번 장편을 발판으로 더 큰 영화도 찍고 싶다고 했다.
② 지난해 말 결성된 인디 음반사 ‘썬독’에는 힙합과 리듬앤드블루스(R&B)를 하는 7개 팀이 속해 있다. 회사라지만 소속 뮤지션 중 한 명이 대표를 하고 매니저는 따로 없다. 서울 홍익대 앞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들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 다수가 작사, 작곡뿐 아니라 PC를 이용한 ‘홈 리코딩’으로 녹음과 믹싱, 마스터링을 진행한다. 이 음원은 온라인을 통해 유통하거나 CD로 제작해 판매한다. 》 ○ 주류문화와 경쟁하지 않는다
민 씨나 썬독 출신 뮤지션들은 ‘셀프 아티스트’로 불린다. ‘셀프 아티스트’는 주류 시스템에 기대는 대신 개인이 제작 또는 유통 등을 담당하는 ‘손수 만들기(DIY·Do It Yourself)’형 문화예술 창작자를 뜻하는 말. 영화나 음악뿐 아니라 디지털 출판이 보편화되면서 개인 혹은 소수의 집단이 소규모로 직접 잡지나 책을 내거나 공연이나 전시를 기획해 활동하는 이도 늘고 있다.
미술평론가 임근준 씨는 “과거 인디는 기존 체제, 주류문화와 각을 세운다는 지향점이 강했던 반면 셀프 아티스트들은 주류문화를 경쟁 대상이 아닌 참고 대상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현재 활동 중인 셀프 아티스트 중에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른바 ‘88만 원 세대’가 많다. 국내 문화산업 성장기인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 중에는 2000년대 영화학과, 실용음악과 개설 붐의 영향으로 영화나 음악 전공자도 많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연예기획사들이 치밀한 마케팅을 시작하면서 제 목소리를 내는 젊은 창작자들은 설 자리를 잃기 시작했다. ‘88만 원 세대’ 저자 우석훈 성공회대 교수는 “문화의 산업적인 면이 부각되고, 자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문화계에서도 젊은 창작자에게 투자하는 모험을 더는 하지 않게 됐다”고 지적했다.
○ 작품 알릴 수 있는 통로 넓어져
최근 셀프 아티스트들의 증가는 이 같은 88만 원 세대 예술가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돌파구를 찾게 되면서 이뤄진 현상으로 분석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출현 등 기술적인 발전도 이들에게 새로운 토양을 제공했다. 유튜브에 자신의 음악을 올리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홍보하는 것은 일상이 됐다. 기획사 없이 홈 리코딩을 해 음반을 만드는 ‘우주히피’의 한국인 씨는 “기존 음반시장이 기울었다고 하지만 거꾸로 음악을 알릴 수 있는 통로가 넓어졌다”면서 “(셀프 아티스트로서) 스타가 되긴 어렵겠지만 좋은 음악을 하면 알아봐주는 사람도 늘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말했다.
셀프 아티스트를 위한 지원 시스템도 진화 중이다.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는 대신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내걸고 민간의 후원을 받는 ‘크라우드 펀딩’이 부상하고 있다. 문화예술 리서치업체 PIO의 황윤숙 대표는 “크라우드 펀딩은 자립의 걸림돌이던 자금 문제를 일부분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의 미래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우 교수는 “한국 문화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영화아카데미 등 새로운 인력 양성을 위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인데 현 시스템은 젊은 창작자에 대한 투자가 없어 문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임근준 평론가는 “젊은 예술가들이 이미 새로운 시장을 형성했고, 그 영향력은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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