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131>부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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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일 03시 00분


부럼 깨는 풍속, 신라-고려 때부터 이어져

정월 대보름이면 땅콩과 호두, 밤, 잣 등으로 부럼을 깬다. 보통은 치아를 튼튼하게 하고 일 년간 부스럼과 종기가 나지 않게 해달라는 소원을 비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부럼으로 깨무는 견과류는 껍데기가 딱딱한 열매다. 그러니 껍데기를 깰 정도로 튼튼한 치아를 갖도록 해달라는 소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견과류를 깨물면서 부스럼과 종기가 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 그리고 언제부터 이런 풍속이 생긴 것일까.

부럼의 유래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견과류나 과일을 깨물면서 피부병을 예방하고 건강한 치아를 갖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것은 먼 옛날부터 볼 수 있었던 풍속이다.

고종 때 이유원은 ‘가오고략(嘉梧藁略)’에서 부럼 깨는 풍속은 신라, 고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우리 문헌에 부럼 깨는 풍속이 집중적으로 보이는 것은 18세기 영정조 이후다.

‘동국세시기’에 대보름날 아침이면 호두와 밤, 잣, 은행, 무를 깨물며 일 년 열두 달 아무 탈 없이 평안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데 이것을 부럼 깨물기라고 했다. 한자로는 작절(嚼癤)이라고 썼는데 깨물 작(嚼)에 부스럼 절(癤)이니 부스럼을 깨물어 터뜨린다는 뜻이다. 혹은 치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풀이했다.

비슷한 시기 서울의 풍속을 기록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는 부럼을 깨는 견과류를 한자로 교창과(咬瘡果)라고 표기했으니 역시 부스럼을 깨무는 과일이라는 의미다. 이 밖에 소종과(消腫果)라고도 하는데 종기를 없앤다는 뜻이니 모두 비슷한 뜻이다.

19세기 때 문인 김려가 쓴 ‘담정유고(a庭遺藁)’에 부럼을 깬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정월 대보름 풍속을 읊은 시에 “호두와 밤을 깨무는 것은 바가지를 깨는 것처럼 종기의 약한 부분을 깨물어 부숴버리는 것이다. 신령의 소리를 흉내 내 솜씨 좋은 의사가 침을 놓는 것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깨문다”고 했다.

부스럼은 피부병이지만 옛날에는 역귀(疫鬼)가 퍼뜨리는 돌림병이라고 믿었다. 그 때문에 역귀를 물리칠 수 있는 신령의 목소리를 빌려 부스럼이 생기기 전에 미리 종기를 터뜨린다는 뜻에서 견과를 깨물었던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겨울인 대보름날 “내 더위 사가라”고 외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부럼을 깨는 이유를 달리 설명하기도 한다. 종기를 미리 터뜨려 부스럼을 없앤다는 효과도 있지만 부럼 깨는 소리에 돌림병 귀신이 놀라 도망가라는 주문이라고도 한다. 순조 때 학자 윤기는 ‘무명자집(無名子集)’에서 부럼으로 밤을 깰 때는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깨물어야 한다고 했다. 조수삼의 ‘추재집(秋齋集)’에도 호두, 밤, 잣을 깨는 소리(作聲)를 부럼 깨는 것이라고 설명했으니 소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옛날 사람들이 왜 그렇게 부스럼 예방에 신경을 썼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요즘은 아토피처럼 화학물질에 의한 피부병이 문제지만, 위생상태가 나빴던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부스럼 앓는 아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 영양 부족과 환경이 청결치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부스럼 같은 피부병이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부럼 깨는 풍속이 생긴 배경이다.

<음식문화평론가>
#대보름날#동국세시기#부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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