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들불처럼 퍼지고 있다. 세계 헤지펀드계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조차 “악마의 시대가 왔다”며 갈 데까지 간 금융자본주의를 비판했을 정도다. 성장에만 치우친 자본주의와 너무 앞서나간 소비사회에 대한 경계심은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서점가에서는 ‘성숙사회 일본’ ‘이제 경제성장은 필요없다’는 류의 ‘혐(嫌)자본주의’ 서적이 쏟아지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이쓰키 히로유키(五木寬之)의 ‘하산(下山)의 사상’(겐토샤·幻冬舍)도 이 같은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저자는 인간이 생로병사를 겪듯 나라도 흥망성쇠의 사이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한다. 성장기와 같은 등산의 시기 이후에는 성숙사회라는 하산을 피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최근의 혐자본주의론 서적들이 숫자와 논리를 동원해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성을 감추지 않는 데 비해 ‘하산의 사상’은 잔잔한 자기 독백에 가깝다. 큰 목소리로 상대를 설득하려 들지 않는 읊조림이기에 울림이 크다.
저자는 일본이 이미 오래전에 하산의 시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이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꼬집는다. “내일을 상상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기에 우리가 모두 알고 있고 느끼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할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까지 미군이 상륙했음에도 패전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제국주의 국민정서”와 다를 바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일본 국민의 현실도피가 하산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 인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60여 년 동안의 상승에 대한 집착이 ‘성장은 당연하다’는 관성적 사고를 만들어냈다는 것. 하지만 저자는 일본이 짧은 시간에 대단한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상당한 무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한다. 십몇 년 동안 해마다 3만3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온 것이 그 단적인 사례다.
저자는 “통계와 자료만이 중시되는 현대사회는 대중의 밑바닥에 흐르는 실감(實感)을 놓쳐버렸다”고 했다. “과학적 합리성과 효율적 논리가 만들어낸 사고체계 속에 정작 인간의 정서는 빠져있다”는 지적은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하산하는 나라는 어떻게 어디를 향해 산을 내려와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다만 저자는 “3·11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제2의 패전을 겪은 일본이 지향해야 할 목표는 국내총생산(GDP) 세계 2위라는 경제대국 재건은 아닐 것”이라며 “이제는 국력을 평가하는 새로운 척도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정상을 향해 등산 중인 한국은 이제 절정을 찍고 하산 중인 일본을 별 볼일 없는 나라쯤으로 여긴다. 아직 성취해야 할 목표가 남아있는 한국으로선 하산을 준비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먼 나라의 한가로운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은 20년 뒤 한국이 겪을 현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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