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장자 등 동양 철학자들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던 장석주 시인(58)은 7, 8년 전쯤 자연스레 주역(周易)에 손길이 갔다. “느닷없이 따귀를 연거푸 맞은 것 같았다”는 게 그 첫인상이었다고 시인은 회상한다. 유교의 3경(三經) 중 하나인 주역은 8괘(八卦)와 64괘 등을 통해 우주와 만물의 원리 등을 설명한 책으로 흔히 점복(占卜)을 볼 때 사용한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같았죠. 한마디로 ‘못 읽었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고, 해설서들을 살펴봐도 제각기 다른 소리만 하고….”
궁금증과 함께 오기가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면 손 가는 대로 주역의 한 페이지를 펴 놓고 천천히 살폈다. ‘왜 오늘 난 이 페이지를 펴게 됐나’를 곰곰이 생각하며 주역의 뜻과 자신에 대해 사색했다. 이런 생활이 수년간 지속되면서 점차 눈이 뜨였다.
“주역은 상당히 과학적인 체계를 갖고 있어요. 우주나 삶에 대한 구조를 가장 단순하게, ‘2진법’으로 풀어냈죠. ‘가려면 가지 말아라’ ‘죽음을 뒤집으면 삶이 된다’ 등 언뜻 보면 모순적인 얘기들이 실제 삶에서 상당히 진실성 있게 다가왔습니다.”
최근 펴낸 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오랫동안’(문예중앙)은 주역에 푹 빠져 지냈던 수년간의 시간을 시어들로 옮겨낸 결과물이다. 집필에 2년 반이 걸렸다. ‘주역시편’이라는 부제도 달았다.
‘하나는/둘,/안이면서/밖./누군가를 베면서/깊이 베인 자.’(‘강의 서쪽-주역시편·108’ 일부) ‘가나 못 가나./해남은/있나 없나./가면 있고 못 가면 없다./이곳에 너는 없고/저곳엔 내가 산다.’(‘달의 사막-주역시편·199’ 일부)
쉽지 않다. 깊은 함축과 은유에 묻힌 시어는 좀처럼 그 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역의 한 구절이 시가 된 것 같고, 시가 주역이 된 것도 같다.
“시와 주역은 많이 맞닿아 있습니다. 주역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느낌으로 갖고 놀면 재미있어요. 이 시집에 담은 시들도 처음 접하면 ‘무슨 소리일까’ 싶을 텐데,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읽으면 됩니다.”
앞날을 내다본다는 점에서도 주역과 시는 닮았다고 시인은 말한다. 무슨 뜻일까.
“시를 쓰는 것도 초험적 세계와 조우하는 것이지요. 시에도 주술성과 예시성이 있습니다. 등단하고서 한 10년 뒤에 등단 무렵의 시집을 보고 소름이 돋은 적이 있어요. 시가 제 삶을 예언했거나, 내가 쓴 시에 맞춰서 내가 살아가고 있었죠.”
‘돗자리를 깔아도 되겠다’고 농을 건네자 시인은 껄껄 웃었다. “주역을 읽고 얻은 깨달음을 쓴 것은 아니에요. 사실 주역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무지의 캄캄함’이죠. 64괘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현관(玄關)의 발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적어 내려갔습니다. 주역시편은 ‘배로 기는 뱀 발이며 개밥에 얹힌 도토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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