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겨울바람처럼 칼칼한 합창이 묵직한 관현악과 어우러졌다. 3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레너드 슬래트킨의 지휘로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의 ‘알렉산드르 넵스키’. 13세기 스웨덴 대군과 독일 기사단을 격파한 러시아 노브고로드 공작의 이야기를 다룬 칸타타다. 총 7곡,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메조소프라노가 40분간 연주하는 대곡이어서 실제 연주를 듣기가 쉽지 않다. 음반도 많지 않은 편이다.
지휘봉을 잡은 디트로이트 심포니 음악감독 레너드 슬래트킨은 미국의 지휘 명가 출신. 클라이버 가문의 에리히와 카를로스 부자처럼 할리우드 볼 오케스트라의 명지휘자였던 아버지 펠릭스 슬래트킨의 가업을 이었다. 슬래트킨 가문은 제정러시아 때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이주한 유대인 집안이다.
러시아의 피가 흐르고 있지만 그의 러시아 작품 해석은 일반적인 러시아 지휘자와 달랐다. 매순간 자극적인 표현의 과잉을 지양하고, 패시지(악구·樂句) 하나하나를 사뿐히 연착륙시키는 스타일이었다. 즉물적인 에너지의 폭발보다는 2차원의 화폭에 옮겨진 듯한 연주였다. 이러한 슬래트킨의 지휘 방식은 첫 곡이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러시아 부활절 서곡’에서 극적으로 고조되는 도취적인 환상성에 제동을 걸곤 했다. 제어는 잘됐지만 온건함을 띠고 있는 질서는 러시아다운 특성과 부합하지 않았다.
이어진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 중 ‘안녕, 고향의 언덕이여’는 메조소프라노 올가 사보바가 노래했다. 풍부한 저음역의 소유자인 그는 이오아나(잔다르크)가 부르는 이별의 정한을 쓸쓸하게 그려냈다.
1부 최대 기대작이었던 차이콥스키의 환상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 곡인 ‘러시아 부활절 서곡’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조의 연주였다. 열병을 앓는 듯한 도입부와 가중되는 불안감과 긴장, 그리고 폭발에 이르는 각 시점의 굽이가 지나치게 완만했다. 작품의 독기를 제거한 듯한 해석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두 작품의 정서가 일관되도록 해석했다는 면에서 적어도 지휘자의 의도가 들쭉날쭉하지 않게 그대로 반영됐음을 알려줬다.
이날의 백미는 역시 2부의 프로코피예프 ‘알렉산드르 넵스키’였다. 국립합창단과 나라오페라합창단, 안양시립합창단이 들려준 합창은 러시아다운 야성적 결이 살아있었다. 특히 5곡 ‘빙상전투’에서 각종 타악기, 관현악과 합창이 어우러지는 박진감은 실제 연주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시아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죽음의 전장’에서 올가 사보바의 노래도 엄숙함을 더해주었다.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장면을 곁들여 스크린에 투사한 자막은 청중의 곡 감상을 도왔다. 연일 강추위를 겪은 청중은 프로코피예프가 음악으로 그린, 눈 덮인 전장의 대서사시에 더욱 실감나게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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