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전문기자의 &joy]전남 무안의 봄맞이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10일 03시 00분


붉은 황토 위 푸른 싹 하늘하늘, 봄은 양파밭서 온다네

전남 무안군 청계면 강정리 양파밭. 파릇파릇 양파 줄기가 훌쩍 자랐다. 저 멀리 무채색 바다와 순한 하늘엔 봄빛이 가득하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땅 속에서, 땅 위에서/공중에서/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보이는 곳에서/보이지 않는 곳에서/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봄은 피어나는 가슴,/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조병화 ‘해마다 봄이 오면’에서) 무안=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전남 무안군 청계면 강정리 양파밭. 파릇파릇 양파 줄기가 훌쩍 자랐다. 저 멀리 무채색 바다와 순한 하늘엔 봄빛이 가득하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땅 속에서, 땅 위에서/공중에서/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 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보이는 곳에서/보이지 않는 곳에서/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봄은 피어나는 가슴,/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조병화 ‘해마다 봄이 오면’에서) 무안=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이성부의 ‘봄’ 전문
오메! 벌써 봄인갑다! 전남 무안 앞바다 거무튀튀한 뻘밭이 입덧을 한다. 자꾸만 헛구역질을 해댄다. 뽀르르! 뽀르! 멸치젓국 같은 갯물을 게워낸다. 슬슬 몸 풀 채비를 하고 있다. 바람은 여전히 알싸하다. 하지만 그 바람 속에 한 올의 ‘포근한 봄 가닥’이 파들거린다. 연녹색 바다풀들이 우우우 들떠 일어난다. 파래밭의 윤기가 자르르하다. 초록 감태밭도 성성하다. 파래 감태 줄기가 탱탱 불어 터졌다. 무채색 바다 위로 언뜻언뜻 아지랑이가 꼬물거린다.

무안(務安)은 ‘물안 고을’이다. 그래서 ‘물안→무안’이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였다. 동남쪽은 홍어냄새 물씬 나는 영산강 하류가 의자 모양으로 흐른다. 영락없는 ‘ㄴ’자를 왼쪽으로 180도 돌려놓은 모양이다. 서쪽은 숭어가 펄쩍펄쩍 뛰노는 서해 칠산 앞바다이다. 톱니바퀴 같은 리아스식 해안 길이가 220km나 된다. 칠산바다는 예로부터 기름진 ‘고래실 뻘’이다. 농어 도미 숭어 우럭 낙지의 살집이 통통하다. 맛이 달고 차지다. 쫀득쫀득하다. 도리포구에 낚시꾼들의 발길이 붐비는 이유다. 낚싯대에 실리는 손맛이 묵직하고 짜릿하다. ‘물안골’에 살다 보면 한자 ‘務安(무안)’처럼 ‘힘써 편안해지는’ 것이다.

무안은 생김새가 좌우로 약간 퉁퉁한 직사각형이다. 가운데에 ‘작지만 큰 산’ 승달산(333m)이 땅과 바다와 강을 품고 있다. 어미 개가 구물구물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다. 스님 500명이 단번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곳이다. 3000년 동안 천하인재가 나온다는 명당이다. 요즘도 전국의 내로라하는 풍수 대가들이 현장 실습하러 온다. 승달산 어딘가에 ‘호남의 제1혈처’가 있다는데 과연 그곳이 어디냐는 것이다.

승달산 자락엔 옛 절터가 수두룩하다. 기왓장 부스러기나 절집 축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즘엔 무덤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거의 하나같이 양지바른 곳에 밥사발 엎어 놓은 듯이 누워 있다. 저마다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뽐내는 듯하다. 승달산 산행은 보통 4개 코스로 나뉜다. 느릿느릿 오르다 보면 어느새 칙칙한 서해바다와 붉은 황토 땅이 발아래 펼쳐진다.


‘목포대입구∼도림마을∼천치골입구∼하루재∼목우암∼법천사∼정상∼목포대입구(4.18km)’ 코스나 ‘월선제∼수월동∼노승봉∼하루재∼목우암∼법천사∼달산저수지(4.4km)’ 코스를 주로 이용한다. 좀 더 긴 곳으로는 ‘청계제일교회∼매봉∼하루재∼노승봉∼목포대(7.4km)’ 코스가 있다.

무안의 봄은 마늘밭 양파밭에서부터 온다. 붉은 황토밭에 푸른 양파와 마늘이 우우우 하늘거린다. 푸른 융단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올해만 양파밭 2715ha(약 815만 평), 마늘밭 638ha(약 192만 평)나 된다. 양파는 전국 생산량의 20%를 차지한다. 대부분 땅 밑에서 뽑아 올린 지하수로 키운다.

무안은 해발 400m 넘는 곳이 없다. 낮은 구릉이 대부분이다. 갯벌을 막아 이룬 간척지만 빼면 전체 면적(436.24km²)의 70%가 붉은 황토다. 무안 황토는 노을빛처럼 붉다. 너무 붉고 고와서 처연하다. 잡티가 없다. 누런색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게르마늄과 칼륨 등 무기물질의 보물단지다. 황토양파, 황토마늘, 황토고구마, 황토양배추, 황토무, 황토갯벌낙지, 황토뻘게…. 모든 생명은 일단 황토와 버무려지면 보약으로 거듭난다.

‘바람 잔날/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한 방울/두 방울/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추녀 물을 세어본다/한 방울/또 한 방울/천 원짜리 한 장 없이/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흘러가는 물방울에/봄이 잦아들었다.’ -박형진 ‘입춘단장’에서

무안 앞바다 연초록 파래밭. 윤기가 자르르하다. 무안=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무안 앞바다 연초록 파래밭. 윤기가 자르르하다. 무안=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봄은 1000원짜리 한 장 없어도 온다. 봄빛은 그냥 천지에 잦아든다. 무안 황토밭은 몽글다. 부드럽다. 하늘은 이미 순한 기운이 가득하다. 햇살은 한결 누그러져 고실고실하다. 도리포구에 서면 함평바다 쪽에서 뜨는 아침 해가 말갛다. 칠산 바다 쪽으로 지는 저녁 해는 온통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토밭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흙냄새를 맡는다. 큼큼하고 구수하다. 가슴이 울렁울렁 메슥거린다. 오호, 어린 쑥이 싹을 내밀고 있다. 냉이 달래가 움트고 있다. 발밑에선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상큼한 파래무침이 먹고 싶다. 풋냄새 질펀한 ‘보리순 된장국’이 미치도록 당긴다. 매움하고 들큼한 풋마늘무침은 또 어떤가. 봄 입덧이 떼 지어 온다. 무안황토 마늘밭에서 우르르 달려온다. 무안황토 양파밭에서 대책 없이 들이닥친다.

■ 품바의 고향 천사마을, 각설이 가고 없는 곳 정겨운 가락만 남아

서울 연극무대에서 큰 인기를 모은 민중 1인극 품바. 동아일보DB
서울 연극무대에서 큰 인기를 모은 민중 1인극 품바. 동아일보DB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으흐∼ 이놈이 이래도 정승판서 자제요, 팔도감사 마다하고 각설이로 나섰네. 지리∼구 지리∼구 잘도 한다. 품바하고나 잘한다.”

거지들의 각설이타령이다. 어릴 적, 시골 장마당에서 흔히 들을 수 있었던 정겨운 소리다. 비록 문전걸식하는 비렁뱅이들이었지만 가락과 해학이 넘쳤다. 여유와 낭만이 있었다. 당겼다 늘였다, 늘어뜨렸다 뽑아 올렸다, 어깨춤이 들썩들썩, 가슴의 응어리가 그만 스르르 녹아내렸다.

능청능청 은근슬쩍 눙치는 아니리에 장꾼들 너나없이 낄낄대다가, 느닷없이 몰아치는 “둥둥! 두두둥!” 자진모리 휘모리 엇모리장단에 모두들 더운 피가 끓어올랐다. 그뿐인가. 한순간 슬그머니 빠져나오는 잉아걸이 가락은 사람들 가슴을 쓸쓸하게 만들었다.

무안은 ‘품바의 고향’이다. 품바는 각설이의 다른 이름이다. 각설이타령이 곧 품바타령인 것이다. 1981년 무안 출신 극작가 김시라 씨(1945∼2001)가 무안 일로읍 공회당에서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민중 1인극 ‘품바’를 무대에 올린 게 그 시초다. 연극 품바는 무안에 실제 있었던 걸인마을 ‘천사촌’이 배경이다. 전국을 떠돌던 100여 명의 거지가 이 고장 사람들의 따뜻한 환대에 그대로 눌러앉아 ‘천사마을’을 이뤘던 것이다.

품바는 각설이타령의 시작과 끝에 반드시 나오는 ‘입방귀’ 후렴이다. “품∼바 품∼바 잘한다”가 그렇다. ‘입으로 뀌는 방귀’이다. 조선시대엔 ‘입으로 치는 장구’라 해서 ‘입 장고’라고 불렸다. 신재효(1812∼1884)가 정리한 변강쇠 타령에 나온다. 흥을 돋우는 일종의 추임새 역할을 한다. 판소리에서 고수나 관객들이 “얼씨구!” “좋다!” 하는 것과 같다. ‘입 풀무질 장단’인 셈이다.

마을이나 장마당에서 “품바∼” 소리가 들리면 각설이패들이 나타난 것을 뜻한다. 품바는 걸인패들의 아이콘이다. 품바의 ‘품’은 ‘품앗이, 품삯’할 때의 ‘품(일하는 데 드는 수고)’과 한자의 ‘稟(품·주다, 받다)’을 뜻한다거나, 겸허함의 ‘빈 것(虛, 空)’을 말한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심오한 의미보다는 단순한 의성어로써 추임새로 쓰였으리라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차라리 각설이가 한자 ‘覺說理(각설리)’ 즉, ‘깨달음의 이치를 알려준다’는 뜻에서 유래됐다는 게 그럴듯하다. 옛 성현들이 저잣거리 사람들에게 쉽게 이치를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노래라는 것이다. 민초들은 그 가르침의 대가로 걸인 바가지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1인극 품바는 19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서울 무대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민초들의 억눌린 가슴을 걸쭉한 입담과 통쾌한 정치풍자로 풀어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요즘의 ‘입방아방송’ 나꼼수라고나 할까. 1996년엔 한국 연극사상 첫 최장기 공연, 최다 관객 동원으로 한국기네스북에 수록됐다. 무안군은 올해 10억 원을 들여 품바 원형 발굴 등에 나선다. 사단법인 일로품바보존회(회장 조순형·061-284-7050)에선 품바체험교실을 열고 있다. 어린이 관객이 많다.

“지리∼구 지리∼구 잘한다. 품∼바 하고도 잘한다. 앉은 고리는 동고리∼ 선고리는 문고리∼ 뛰는 고리는 개고리∼ 나는 고리는 꾀꼬리∼ 입은 고리는 저고리라. 일자나 한 장 들고나∼봐 일월이 송송 야송송∼ 밤중 샛별이 완연하다. 이자나 한 장 들고 봐∼”

■ 立春이 入春이 아닌 까닭은…

입춘은 왜 한자로 ‘들일 入(입)’자의 ‘入春(입춘)’이 아니고, ‘설 立(립)’자의 ‘立春(입춘)’일까. 그렇다. 입춘(2월 4일)은 그저 ‘봄기운이 들어섰다’는 뜻일 뿐이다. 결코 ‘봄이 시작되는 날’이 아니다. 더구나 24절기는 고대 중국 황허 강 주변인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화베이 지방은 위도가 북위 34.8도로 우리나라 제주도(33∼34도)와 부산(35도) 사이에 위치한다. 무안(35도)은 몰라도, 한참 북쪽에 사는 서울(37.6도) 사람이 입춘 날 봄을 느끼기엔 힘들다. 봄이 와도 도무지 봄 같지 않은 것이다(春來不似春).

기상학적으로 봄은 ‘하루 평균기온이 5도가 넘을 때’를 말한다. 우리나라 최근 30년간(1981∼2010년) 하루 평균기온이 5도가 넘어선 날은 3월 12일이었다. 입춘 지난 뒤 무려 36∼37일이나 걸렸다. 서울은 입춘 뒤 39∼40일 지난 3월 15일에야 5도를 넘었다. 이에 반해 부산은 입춘 뒤 7∼8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올해의 경우 부산이나 무안은 2월 11,12일쯤이면 봄이 온다는 계산이다.

지난 30년간 입춘 날 평균기온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남한) 전체로는 영하 1.5도, 그중에서도 서울은 영하 2도를 기록했다. 중부지방인 청주(―1.9도)와 비슷했지만 광주(0.7도) 강릉(1.0도) 부산(3.1도)보다 훨씬 추웠다. 입춘 날 봄 날씨를 보인 것은 역시 제주(5.2도)가 유일했다. 제주도엔 이미 봄이 온 것이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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