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남 씨(70)는 이 말이 가장 듣고 싶다고 했다. 소박한 바람처럼 보이기도, 참 뜬금없는 얘기 같기도 하다. 내가 나답다는 게 뭘까. 그는 자신의 부족한 허물을 꼭꼭 감추려다 보면 세상살이가 너무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부족함마저 ‘나의 일부’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게 바로 내가 나답게 사는 길이란다. 물론 그걸 깨닫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한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 이 씨는 어떻게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됐을까. ‘프로’ 금융인에서 ‘아마추어’ 화가로
7일 경기 용인시 성복동의 한 아파트에서 이 씨를 만났다. 그는 외환위기 때 한국은행 부총재(1998∼2000년)를 지냈고, 금융연수원장(2000∼2003년)까지 지낸 전문 금융인이었다. 은퇴 후에도 한국금융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이나 민간은행 사외이사직을 맡으며 한동안 금융과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현직에 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주말이나 돼야 겨우 만나던 ‘애인’을 매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림이었다. 그는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있던 1997년 김일해 화백에게서 처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창 일이 넘치던 때였기에 주말에 한 번 시간을 내 그림을 그리는 것도 그에겐 사치였다. 그러나 그는 “바빴기 때문에 더 재미있었다. 항상 토요일 오후를 기다리며 살 정도로 그림에 푹 빠져버렸다”고 기억한다.
그를 사로잡은 그림 그리기의 첫째 매력은 ‘몰입’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몰아지경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고, 치유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새로워졌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고,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주변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시선이 닿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던 중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자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제 그림을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무의식중에 그린 선들의 흐름이 참 오묘하더군요. 또 어떨 때는 색의 연결이 환상적이었고요. 그걸 보면서 ‘내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아름다움이 참 많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저를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건 그림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자기 안의 아름다움, 선함, 도전정신 같은 것들을 더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게 됐다.
다만 ‘화가’라는 표현만큼은 언제나 부담스럽다. 2002년과 2003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두 차례나 입상했고 개인전 경험도 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아마추어’라 부른다. 아마추어는 최대한 아마추어다워야 생명력이 더 길지 어쭙잖게 프로 흉내를 냈다가는 보는 이에게 불편함만 줄 수 있다는 게 이유다.
미술에서 감성을 찾아내다
이 씨는 금융연수원에서 은행 지점장들을 대상으로 했던 한 강의 얘기를 꺼냈다. 강의에 앞서 그는 수채화 물감과 A4용지를 나눠주고는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손끝이 가는 대로, 머뭇거리지 말고 무엇이든 그려보라고 했다. 10분 정도 후. 그는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그림에 사인한 뒤 가족에게 선물을 하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몇몇이 다시 그리기를 강력히 요청했고, 그는 할 수 없이 모두에게 A4를 나눠주고 다시 10분을 기다렸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첫 번째는 상당수가 정말 좋은 그림들을 그렸어요. 그런데 똑같은 요령으로 그리라고 했는데도 두 번째 작품 중에는 칭찬하고 싶은 그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물을 한다고 생각하니 남을 의식하게 된 거죠. 자기가 예전에 봤던 그림을 흉내도 내고, 작위적으로 연출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도저도 아닌 그림이 된 거예요.”
그는 이 일화를 통해 그림 속에는 자기 자신의 순수한 감성이 그대로 묻어난다는 걸 얘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사실 2004년 가톨릭대 평생교육원에서 미술치료 자격증을 땄다. 조손가정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회봉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미술치료사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미술로 상처가 있는 이들을 다독여주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치료자는 상처를 받은 사람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그 안의 울분을 토로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방법으로 그림만큼 유익한 통로는 없다고 그는 설명했다.
“모든 솔루션은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그걸 그림을 통해 토해내도록 돕는 것이죠.”
이 씨는 2시간 남짓한 인터뷰 말미에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혼불’에 나온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구절을 소개했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인간은 불안, 걱정, 외로움과 늘 함께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어두운 면을 벗어나야 빛으로 갈 수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어둠에 정직하게 머물 수 있어야 밝은 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앞으로 추상화라는 새로운 시도를 할 예정이다. 그림의 형식은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는 앞으로도 마음속의 많은 것을 그림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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