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등장한 비엔나(빈) 뮤지컬의 첫 대표주자라고 할 ‘엘리자벳’은 1992년 탄생했다. 뮤지컬 ‘에비타’(1978년)와 ‘명성황후’(1995년) 사이다. 셋 다 몰락하는 체제에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실존 여성의 삶을 그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수도 있다.
명랑하고 자유분방하던 소녀가 당시 유럽 보수반동주의의 상징이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후가 되고 남편을 쥐락펴락하던 시어머니의 정치적 맞수로 떠오르는 내용은 ‘명성황후’를 연상시킨다. 명성황후가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맞서 남편 광무황제(고종)의 정치적 독립을 도왔다면 엘리자벳은 시어머니 소피 대공비의 꼭두각시였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홀로서기를 돕는다.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 아름다운 이미지에 있음을 알고 이를 가꾸고 뽐내기 위해 온갖 사치를 부리면서 민중에겐 자비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진 점은 ‘에비타’를 닮았다. 에바 페론이 아르헨티나 민중에게 에비타란 애칭으로 불렸듯 엘리자벳은 ‘시시’란 애칭으로 불렸다.
비엔나 뮤지컬로 국내에 먼저 소개된 ‘모차르트!’를 본 관객이라면 ‘여자 모차르트’가 떠오름 직하다. 록스타 복장의 모차르트가 “나는 난 음악”이라며 영혼의 자유를 노래하듯, 엘리자벳 역시 1막 내내 “내 인생은 나의 것…내 주인은 나야”를 열창한다. 그 메인 테마곡 ‘나는 나만의 것’은 ‘모차르트!’의 넘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금별’의 멜로디를 떠오르게 한다. 두 작품의 작사가와 작곡가가 미하엘 쿤체와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란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이 뮤지컬의 진짜 묘미는 엘리자벳이란 인물을 통해 19세기 말 빈을 관통하던 모순투성이의 시대정신을 극화하려고 시도한 점이다. 사실 엘리자벳의 삶은 극적일지는 몰라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권부의 핵심에 있으면서 역설적으로 자유를 꿈꾸고, 정작 자유를 쟁취한 다음엔 남편과 아들을 내팽개치고 제국 곳곳을 방황하다가 외동아들 루돌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극작가 쿤체는 그런 그의 이율배반적 삶을 하나로 엮기 위해 두 개의 추상명사를 드라마 속에 녹여 넣었다. ‘광기’와 ‘죽음’이다. 광기는 1898년 엘리자벳을 암살한 루케니로 육화됐다. 극 서두 교수형용 올가미에 매달린 채 등장하는 그는 “당신은 도대체 왜 황후를 암살했소”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극의 해설자로 출몰한다. 죽음(독일어로 Tod)은 아예 의인화된다. 어린 시절 줄타기 놀이를 하던 중 추락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엘리자벳의 첫사랑으로 등장한다.
극중 엘리자벳은 유전병인 정신병에 사로잡힐까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에 흔들린다. 이는 에로스(사랑의 신)의 퇴폐적 아름다움에 취하면서 이를 죽음충동으로서 타나토스(죽음의 신)와 동일시했던 세기말 빈의 내면 풍경과 정확히 공명한다.
1848년 혁명이 무산된 뒤 집권한 프란츠 요제프 시대의 빈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의 결합으로 영혼의 자유를 횃불로 치켜들었지만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사회주의 같은 대중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프로이트로 상징되는 무의식의 동굴로 굴러 떨어진다. 엘리자벳의 부조리하면서도 치명적인 아름다움은 바로 당시의 이런 시대정신을 상징한다. 그녀의 남편(제국주의의 상징으로서 프란츠)과 아들(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루돌프)의 대립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생생한 사례다.
하지만 정작 뮤지컬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화려함이나 개별 캐릭터의 외형적 매력에 취해 이런 묘미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다. 34명이나 되는 출연 배우, 대형세트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회전무대, 합스부르크 제국의 풍광을 쏟아내는 대형 영사막의 물량 공세는 확실히 눈요깃거리다. 하지만 작품의 핵심을 움켜쥐지 못했다는 무의식적 불안을 달래기 위해 지나치게 볼거리에 치중한 탓에 관객의 작품 이해엔 걸림돌로 작용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로버트 조핸슨 연출. 엘리자벳 역으로 김선영과 옥주현, 죽음 역으로 류정한 송창의 김준수, 루케니 역으로 김수용 최민철 박은태가
출연한다. 5월 13일까지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3만∼15만 원. 02-6391-633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