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Issue]하루 8리터 벌컥벌컥 “입에선 생선 비린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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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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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8리터 벌컥벌컥…물맛은 쓰고 열매는 달다

땀복을 입고 훈련을 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의 몸에선 물기가 마를 새가 없다. 하루에 물을 8L 넘게 마시고 있어서다. 다음 달 3일 경기를 할 예정인 김장용이 14일 오후 체육관에서 굵은 땀방울을 쏟아내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땀복을 입고 훈련을 하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그의 몸에선 물기가 마를 새가 없다. 하루에 물을 8L 넘게 마시고 있어서다. 다음 달 3일 경기를 할 예정인 김장용이 14일 오후 체육관에서 굵은 땀방울을 쏟아내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작지만 부리부리한 눈. 굳게 다문 입술에 다부진 턱선. 떡 벌어진 어깨와 조각같이 빚어진 근육. ‘야수’라는 별명답게 그는 숨 막히는 카리스마로 기자를 압도했다. 묵직한 ‘로킥’(발로 상대방의 다리를 공격하는 기술)이 샌드백을 강타하는 소리가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구석에서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다가왔다.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옆에 놓인 1.5L 페트병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정말 죽겠다”며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물을 마시는 모습이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의 곁엔 빈 페트병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그때서야 용기가 생긴 기자가 다가가 물었다. “원래 그렇게 물을 많이 마셔요?”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더니 그가 대답했다. “요즘엔 하루에 8L 넘게 마십니다.”

물과의 전쟁

이야기의 주인공은 종합격투기 선수 김장용(28). 1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의 코리안탑팀체육관에서 만난 그는 한창 ‘물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음 달 3일 괌에서 열리는 종합격투기 이벤트 ‘PXC 30’의 메인 경기를 장식할 예정인 그는 이미 한 달 전부터 물을 하루에 8L 이상 마셔왔다. 지금은 순수 훈련 시간만 하루 6시간을 넘길 만큼 훈련 강도를 높였지만 식사량은 오히려 줄였다. 그 대신 물로 배를 채운다.

한번에 많이 마시면 효과가 적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잘 때까지 꾸준히 물을 마셔 ‘물배’를 채우는 게 좋다. 그래서 그의 곁엔 항상 물이 담긴 페트병이 놓여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한번에 많이 마시면 효과가 적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잘 때까지 꾸준히 물을 마셔 ‘물배’를 채우는 게 좋다. 그래서 그의 곁엔 항상 물이 담긴 페트병이 놓여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체력 소모가 가장 많은 시점에 밥 대신 물로 배를 채우는 이유가 뭘까. 하동진 감독(코리안탑팀)은 “‘수분 다이어트’ 중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체급 종목 선수들은 평상시 자기 체급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요. 10kg 이상 많이 나가는 경우도 흔하죠. 그러다 경기 하루 전쯤 열리는 계체량을 앞두고 체중을 급격하게 줄입니다. 계체량을 통과한 뒤 몸무게를 다시 늘려 경기에 출전하면 그만큼 힘에서 이득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단기간에 몸무게를 줄이는 어려움은 상상 이상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최민호(32)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체중 조절에 실패해 동메달에 그쳤다. 대표팀의 산실 태릉선수촌에선 명절을 앞두고 비상이 걸린다. 힘들게 관리한 선수들의 체중이 명절음식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 한국 여자 격투기의 간판 임수정(27)은 지난달 한 격투기대회에서 체중 감량에 실패해 벌점을 받으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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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와의 싸움


이러다 보니 체급 종목 선수들에게 체중 감량은 상대와의 싸움에 앞선 ‘자기와의 싸움’으로 불린다. 힘은 제대로 내면서 몸무게를 효율적으로 줄이는 방법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야말로 눈물겹다.

수분 다이어트는 종합격투기를 중심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체중감량법. 김장용은 “보통 경기 일정이 잡히면 두 달 전부터 하루에 물을 8L 이상 마시는데 계체량을 열흘쯤 남겨두곤 양을 12L 이상으로 늘린다”고 말했다. “그러다 계체량 이틀쯤 전부터는 마시는 양을 점점 줄여요. 하루 전부턴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죠. 그동안 축적한 수분을 거의 ‘말리는’ 수준으로 몸에서 제거합니다.”

과거엔 저염분 식단 등 식이요법만으로 체중을 감량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워낙 체지방이 적은 격투기 선수들은 몸무게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 감독은 “선수의 체급, 체질 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수분 다이어트만큼 효율적인 감량 방법은 없다”고 했다.

물론 효과가 큰 만큼 고통도 엄청나다. 일단 물을 하루에 8L 이상 마신다는 게 곤혹스럽다. 지난해 12월 UFC(미국에 있는 세계 최대의 종합격투기 단체) 대회에서 정상급 강자인 마크 호미닉을 단 7초 만에 눕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정찬성(25·코리안탑팀)은 14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시다 보면 물맛이 쓰게 느껴진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밤에 자다가도 몇 번씩 일어나 화장실을 가야 하는 것도 선수들이 토로하는 괴로움.

땀복, 트레이닝복에 사우나

계체량 직전 몸에서 수분을 제거하는 과정은 고통의 하이라이트다. 이날 기자는 직접 땀복(특수 소재를 사용해 몸을 인위적으로 덥게 해 땀을 내게 만드는 옷)을 입고 3시간가량 선수들과 운동을 한 뒤 사우나까지 같이 가봤다. 나름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땀을 뺐지만 줄어든 몸무게는 고작 1kg 남짓.

짧게는 3, 4일에 10kg 이상 감량하는 선수들은 어떨까. 한국 종합격투기의 간판 김동현(31·부산팀매드)은 “체중을 급격하게 줄이면 입에선 생선 비린내가 나고 손발이 덜덜 떨린다”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전했다. 특히 생각만큼 수분이 잘 빠지지 않을 경우 선수들은 극한의 상황에 직면한다. 정찬성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 서 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땀복 위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사우나에 간다. 거의 실신 직전에 잠깐 나와 바람을 쐰 다음 다시 사우나에 들어가길 반복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선 선수들이 극도로 예민해져 감독조차 거의 말을 걸지 않는다. 게다가 노장 선수들의 경우 체중 조절을 반복하다 보니 신체의 ‘내성’이 생겨 체중을 빼는 게 더 힘들다.

선수들은 계체량을 통과한 뒤엔 혹시 쇼크라도 올까 물을 마실 때도 조심스러워한다. 하지만 다시 체중을 불려야 하기에 전해질 음료와 죽 등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억지로라도 먹어 배를 채운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체중을 줄이고 늘리면 몸에 부담을 주진 않을까. 성봉주 체육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돼지고기 한 근이 600g이다. 그런데 10kg을 며칠 만에 뺀다면 그 자체가 사선(死線)을 넘나들 만큼 위험한 행동이다. 장기적으로 신체 기능이 상당히 손상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성호 격투기 전문 해설가 역시 “특히 신장과 소화기 계통에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농담으로 선수들끼리 얘기해요. 10kg을 빼는 게 정상은 아니지만 어차피 운동 자체가 극한에 도전하는 종목 아니냐고. 한 번의 승부에 모든 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사우나에서 천장이 노랗게 보여도 수건을 깨물고 참게 됩니다.” 김장용이 수분 다이어트로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해준 한마디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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