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플랫폼에서 대형 지네나 악어가 굵은 몸통을 밀며 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란색 안전선 안에서 줄을 맞춰 기다려도 내가 정말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았다.”- 윤고은, ‘무중력증후군’》 중간고사 스타트를 끊기 하루 전날 밤. 책상 위에 쌓인 책마다 시험 범위 표시가 돼 있지만 절반도 공부가 안돼 있다. 마음이 조급하니 외우려고 안간힘을 쓰는 단어들도 금세 머릿속에서 휘발돼 버리고 책장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다 보면 시간만 흐른다. 남은 시간은 빤하다. 문득 초인적인 벼락치기 신공을 발휘한다고 해도 도저히 시험을 잘 치러낼 자신이 없어진다. 그럴 때 머리를 감싸 쥐고 생각한다. 어디서 전쟁 같은 거 일어날 확률 없을까? 초봄부터 폭설이 내려 휴교령이라도 떨어질 순 없나? 지진으로 학교 건물이 붕괴될 확률은 없을까? 아 하나님, 정녕 내일 아침이 오지 않게 해주실 순 없는 건가요?
실제로 내 경우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불과 두어 달 앞둔 시점, 이런 희망이 거의 이뤄지는 듯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에는 수능이란 게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통과의례처럼 느껴졌다. 수능을 잘 칠 수 있을지 없을지, 그 결과에 따라 이후 삶의 방향이 어떻게 바뀔지 거의 매일 밤잠을 설치던 그때 그 사건이 발생했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던 날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돌진해온 비행기 때문에 수직으로 붕괴되는 자극적인 장면이 뉴스특보란 이름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America under attack’이란 자막이 번쩍이며 흘러나왔고 전문가들은 제3차 세계대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 충격적인 장면에 넋을 놓고 있던 내가 떨리는 마음으로 했던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되면…수능 안 쳐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위의 어떤 경우든, 내가 정말 기다리는 것들은 오지 않았다. 준비가 돼 있든 안돼 있든 시험 날 아침 해는 어김없이 밝아왔다. 미국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한국의 수험생인 내게는 아무 영향이 없었다.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이 따위 수리영역 공부에 인생을 낭비하고 있게 생겼느냐,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라’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바로 다음 날부터 학교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놀라운 평온을 유지하며 수능 준비에 매진했다. 세상은 시계추처럼 정확하게 돌아갔다. 누군가를 위해 하루를 유예시켜 주지도,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뒤집어 버리지도 않았다.
재미있는 건, 출근길 플랫폼에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이 여전히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산다는 점이다. 우리는 때로 은밀하게 판타지에 가까운 어떤 이변(異變)에 대한 기대를 품고 산다. 매일 똑같은 사무실, 식상한 사람들, 시시껄렁한 하루 일과와 스트레스 쌓이는 업무들, 지겹기만 한 술자리…. 벗어나고 싶지만 여느 때처럼 객차가 제 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들어서서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 그런데 만약 플랫폼에 열차 대신 대형 지네나 악어가 나타난다면? 결근은 더없이 정당해진다. 더구나 지하철을 점령한 괴물에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세상에서, 굳이 자아실현과 관련도 없는 일을 돈 때문에 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일요일 밤마다 ‘개그콘서트’의 엔딩송(‘내일이면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알람송)을 들으며 불안에 떠는 한국의 숱한 직장인들도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새 일을 찾아 용기 있게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재난, 파업과 시위, 질병, 각종 사고 혹은 달의 증식(윤고은의 소설 ‘무중력증후군’은 달이 증식하는 초유의 사태에서 벌어진 소동을 다룬 소설이다)…. 일상의 균형이 깨지는 비상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에 좀 더 편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다. 현재 삶에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허위’일 뿐인지 구분해 내기가 좀 더 쉽고, 누구든 바로 그 ‘진짜’로 직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변수, 계산, 가정이 뒤범벅된 평범한 일상 속에서, 그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의 선택과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 대신 자신을 상황에 은근슬쩍 내맡긴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 무료한 삶을 송두리째 바꿔주기를. 하지만 어김없이 정시에 맞춰 플랫폼에 들어서는 이 평범한 열차를 보라. 슬프지만 ‘기대했던 재앙’ 따윈 오지 않는다. 하늘의 달은 언제나 하나뿐. 노란색 안전선 안에서 줄을 맞춰 아무리 기다려도, 우리가 정말로 기다리는 것들은 결코 오지 않는다.
appena@naver.com 톨이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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