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극 제법 대담하다. 평생 앙천대소(仰天大笑)하며 대자유인을 자처했던 장자를 희롱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프랑스로 망명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오싱젠 원작의 연극답다. 가오싱젠이 1987년 베이징에서 초고를 쓰고 1991년 파리에서 완성한 ‘저승’은 얼핏 둘로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구성이 둘로 나뉜다. 장주(장자의 본명)와 그의 젊은 아내를 주인공으로 한 중국의 경극 ‘관을 부수다’와 ‘저승까지 찾아가다’란 두 작품을 엮었기 때문이다. ‘관을 부수다’는 독수공방하는 아내(천정하)의 정절을 의심한 장주(박상종)가 스스로 죽은 척 위장한 다음 초나라 귀공자로 변장해 문상을 빌미로 아내를 유혹한다는 내용이다. ‘저승까지 찾아가다’는 남편의 희롱에 놀아난 것을 알고 자결한 장주의 아내가 저승에서 자신의 한을 씻으려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구성 때문에 무대공간도 이승과 저승으로 대별되고 주요 등장인물도 이승 이야기를 끌고 가는 장주와 저승 이야기를 주도하는 아내의 대립구도로 펼쳐진다. 하지만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면 ‘세 바퀴의 법칙’이 발견된다. 우선 장주가 아내를 속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가 세 차례 반복된다. 첫 번째는 ‘관을 부수다’의 내용이다. 두 번째는 이승에서 잘잘못을 판정하는 판관 앞에서 장주 아내의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세 번째는 판관에게서도 음부(淫婦)란 판결을 받고 혀를 뽑힌 장주 아내가 북을 쳐 염라대왕을 불러낸 뒤 저승의 수문장 격인 흑무상과 백무상의 연기로 재연된다.
이는 라캉이 말한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와 묘하게 맞물린다. 상징계는 이성적 논리와 언어로 구성되는 세계다. 언어유희의 대가인 장주는 이 상징계를 조롱하고 희롱하는 데 ‘선수’다. 아내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저승이란 상상계의 공간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자 한다.
하지만 상상계는 본디 상징계의 왜곡된 거울에 불과하다. 공정한 판결을 기대했던 판관은 상징계의 타락한 부산물로서 일그러진 재판관의 전형이다. 양심이 아니라 뇌물에 따라 판결을 내리고, 통속적인 흑백론의 지배를 받는 고정관념의 화신이다. 그는 상징계보다 더 혹독한 기준으로 장주 아내를 심판한다.
말을 잃은 장주의 아내는 마지막으로 저승의 지배자인 염라대왕을 호명한다. 요괴가 들끓는 염라대왕의 세계는 상징과 상상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실재계를 상징한다. 그곳은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내가 모르는 내가 출몰하는 공간이다. 결국 장주 아내는 염라대왕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끔찍한 실상과 대면하고 미쳐 날뛴다.
이런 ‘3의 법칙’은 장주에게도 적용된다. 연극 속 장주는 장주 자신, 초나라의 귀공자, 그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해설자로서 1인 3역을 소화한다. 연극은 두 개의 경극 사이사이에 장주가 지은 ‘장자’란 제3의 텍스트를 삽입한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라는 호접몽의 구절이 대표적이다.
연극은 이를 통해 세상만사에 도통한 듯 구는 ‘얄미운 장자’를 놀려먹고 싶은 민중의 욕망을 투사한다. 동시에 아무리 몸부림쳐도 장자 자신을 포함해 장자가 쳐놓은 통찰의 그물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슬프게 일깨워준다. 그것은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의 삼중망에 걸린 채 퍼덕거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에 대한 애가(哀歌)이기도 하다.
원작의 상징성을 연극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저승 장면에서 가면을 빠르게 바꿔 쓰는 중국식 변검(變瞼)과 불을 뿜어내는 토화(吐火), 장대타기 등 다양한 볼거리로 대극장 무대를 가득 채웠다. 타악 아쟁 대금으로 구성된 4인조 국악 밴드의 라이브 반주로 한국적 정한(情恨)과 중국 경극의 효과를 함께 빚어내는 시도가 신선하다. 무엇보다 박상종 씨의 차가운 ‘물빛 연기’와 천정하 씨의 뜨거운 ‘불빛 연기’의 균형이 좋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박정석 연출. 26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만∼4만 원. 02-762-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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