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만난 영화 ‘러브 픽션’(29일 개봉)의 제작사 삼거리픽쳐스의 엄용훈 대표는 영화를 못 찍을 뻔했다고 말했다. 촬영 시작 4년 전 남자 주인공으로 하정우와 계약했지만 주연 여배우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가 재미있다고 소문이 났지만 막상 읽어본 여배우마다 출연을 꺼렸다. 캐릭터가 비호감이라는 이유에서다. CF 등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 배우들이 고사하는 눈치였다.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공효진(32·사진)이었다.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공효진은 “4년 전 ‘미쓰 홍당무’도 했는데 이 정도야 못하겠느냐는 생각이 시나리오를 보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알래스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자유로운 영혼의 ‘돌싱’(이혼녀)이자 영화사 직원인 희진으로 등장한다. 희진은 서른이 넘도록 연애 한 번 못해본 소설가 주월(하정우)의 뮤즈(작품에 영감을 주는 존재)다. 주월은 갖은 노력 끝에 희진을 침대로 끌어들이지만 그녀의 겨드랑이에는 ‘숲’이 무성하다. 놀라는 표정의 주월에게 희진은 “알래스카에선 안 깎는데 이상해?”라고 말한다. 희진은 초등학교 시절 실수로 똥 싼 이야기도 거리낌 없이 주월의 친구들에게 늘어놓는다.
“이미지가 망가질까봐 걱정하는 건 (배우로서) 너무 소심하죠. 천하의 미녀 배우 샬리즈 시어런도 ‘몬스터’에서 기꺼이 망가졌잖아요. 저처럼 용감한 배우가 많이 나와야 해요.”
툭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 교사 역을 했던 ‘미쓰 홍당무’는 배우로서, 또 자연인으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에는 술을 한 잔도 안 마셨어요. 얼굴이 빨개지는 게 싫어서요. 하지만 ‘…홍당무’를 찍은 뒤 얼굴 빨개지는 게 창피하지 않게 됐어요. 자신이 구축한 껍질을 깨는 자유를 얻은 거죠. 그런데 ‘겨털’(겨드랑이 털)쯤이야….” 지금 그의 주량은 소주 한 병 반까지 ‘진보’했단다.
영화는 여느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한발 비켜서 있다. 주월과 희진의 관계는 사소한 오해가 쌓여 틀어지고, 연애의 찌꺼기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낳는다. “사실 이 영화는 남자들이 들려주는 연애의 후일담이에요. 여성이 어떻게 연애를 바라보는지는 생략돼 있어요. 하지만 연애를 해 본 분들은 생생한 대사들에 공감할 겁니다.”
소설가 주월이 쏟아내는 문어체 대사들은 이 영화의 쏠쏠한 재미다. “님은 사랑이 뭐냐 하였고, 나는 당신의 부재에 따르는 공포라 답하였다” “님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책이 뭐냐 하였고, 나는 전 인류가 누드로 생활하는 것이라 답하였다” 등의 대사가 극을 맛깔스럽게 한다.
그동안 그는 스스로 말하듯 ‘남자도 이겨먹을 듯한’ ‘속내를 다 드러내는’ 캐릭터를 주로 해왔다. ‘품행제로’에서의 여자 일진, ‘M’의 부유하고 도도한 약혼녀 등이 그것이다. “이제는 감내하고 속으로 삭이는 역을 하고 싶어요. 과묵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여자 두목 같은 역. 이런 걸 ‘내면 연기’라고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재미없죠?”
실제로도 세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어릴 적 소심한 성격이었단다. “A형이죠. 발표도 잘 못하고 큰 키(172cm)에 말라 ‘참새 다리’라고 놀림을 받곤 했어요. 근데 큰일에는 대범하고 작은 일에는 쉽게 상처받는 스타일이에요. 강아지인데 고양이고 싶은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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